"아빠, 우리 술 한 잔 하구 놀자"

가족이 함께 하는 '공부놀이' 어떻습니까

등록 2005.03.20 19:37수정 2005.06.2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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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 차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는 작은 아이, 인상이 녀석이 우리나라 지도를 반으로 가르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후반전이고…."

인상이 녀석의 강의를 듣고 있던 나머지 식구들이 배꼽을 잡고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칠판에 지도를 그리고 거기에 '조선팔도'를 적어 넣겠다는 녀석이 휴전선을 '중앙선'도 아닌 '후반전'으로 잘못 발음했던 것입니다.

a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놓고 휴전선을 '후반전'이라고 강의하던 작은아이 인상이. 강의보다는 지도  그린 솜씨가 더 낫습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놓고 휴전선을 '후반전'이라고 강의하던 작은아이 인상이. 강의보다는 지도 그린 솜씨가 더 낫습니다. ⓒ 송성영

우리 식구는 가끔씩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텔레비전이 아니라 작은 게시판 앞으로 모입니다. 게시판 앞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보다 더 재미있는 '공부 놀이'를 벌입니다.

텔레비전은 일방적으로 보고 있어야만 하지만 아내가 개발한 '공부놀이'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해 돌아가면서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합니다.

"인상아 무슨 도, 무슨 도 할 때 말여, 남도 북도를 붙이는 이유가 뭔 줄 알어?"
"북쪽에 있으니까 북도고, 남쪽에 있으니까 남도지."


"그렇지, 그람 동해는 뭔 뜻인겨?"
"이거, 어, 어…."
"동쪽 할 때 동녘 동, 바다 해, 동해는 동쪽에 있는 바다란 뜻여, 남해는 남쪽에 있는 바다구."
"그럼 서해는 서쪽 바다겠네."

"그렇지! 저번에 우리 안면도에 갔었지? 거기가 서해여, 서해에는 갯벌이 많지? 게들이 오글오글 기어다니는 갯벌이 아주 많은 데가 서해여."


남들이 보면 그렇고 그런 별 재미없는 내용이겠지만 우리 집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시간입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학교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마치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턱하니 게시판에 그림을 그려놓고 엄마 아빠를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부모 된 우리 부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새끼들이 언제 그렇게 다 컸나 싶어 흐뭇합니다.

큰 아이 인효는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강의하곤 합니다. 오늘은 그동안 우리나라로 지나간 태풍의 이름과 경로를 지도 위에 별로 나열했고 그 한 옆에는 미국 지도를 그려 놓고는 서부 쪽 땅이 갈라져 앞으로 대재앙이 온다는 어설픈 강의를 했습니다.

a 우리나라를 지나간 태풍경로를 설명하고 있는 큰 아이 인효. 지도 그림 솜씨 보다는 강의가 더 낫습니다.

우리나라를 지나간 태풍경로를 설명하고 있는 큰 아이 인효. 지도 그림 솜씨 보다는 강의가 더 낫습니다. ⓒ 송성영

"질문 있는디, 왜 대재앙이 온다고 생각하는겨?"
"미국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니까."
"그냥 나쁜 마음을 먹는다고 무조건 대재앙이 오는겨?"
"인터넷에 그렇게 써 있는디…."

"인터넷에 써 있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녀, 니가 본 얘기는 확신할수 없는데,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대재앙이 온다는 것은 아빠 생각도 마찬가지여.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환경을 파괴하거나 전쟁도 일으킬 수 있지, 그럼 어떻게 되겠어? 전쟁이 일어나면 나쁜 마음을 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더 많은 것들이 파괴되겠지, 결국 그것이 대재앙을 몰고 오는 겨, 하지만 대재앙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을 품으면 언제든지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디, 니 생각은 어뗘?"

아이들뿐만 아닙니다. 엄마 아빠까지 네 식구 모두가 돌아가면서 강의합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선생님처럼 강의 하니까 신기해하고 재밌어 합니다.

한창 침술을 배우고 있는 엄마는 주로 인체에 관한 강의를 하는 편이고 아빠인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인상 깊고 재미있었던 일들을 글짓기로 풀어 나갑니다.

a 팔 부위에 침이 들어갔을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강의하는 아내

팔 부위에 침이 들어갔을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강의하는 아내 ⓒ 송성영

우리 식구의 '공부놀이'에서 '조기교육'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흔히 말하는 '조기교육' 따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공부입니다. 일류대학 가는데 첫 걸음이라고 말하는 영어 수학 따위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교육학자들이 말하는 그렇고 그런 '학문적 인성교육' 따위들 하고도 상관없습니다. 규칙도 없고 이렇다할 감독도 없는 그저 즐겁고 재미있는 우리 식구들만의 공부놀이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일류대학 보내려고 조기교육 시키는 부모들이 본다면 '별 미친 인간들도 다 보겠네, 아까운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구먼' 이라고 할 만큼 참말로 '어리석은' 공부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식구의 '공부놀이'를 위한 모임은 일주일에 두 세 차례 정도. 그렇다고 정기적인 모임은 아닙니다.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서, 다들 시간이 맞아떨어지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안방 벽에 게시판을 걸어 놓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내의 어떤 규칙이 작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책 읽고 모여서 서로 얘기해 보자'라는 식의 모임을 이끌어 가기 위한 최소한의 것입니다.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기 싫어하기 보다는 하고 싶어하는 쪽입니다. 엄마 아빠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함께 하는 공부라서 그런지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오히려 아빠인 내가 이 모임에서 참석율이 가장 저조한 '뺀돌이'랍니다.

자신들의 할 일을 다하고 한자리에 모이면 주로 책을 봅니다. 만화책도 보고 동화책도 보고 때에 따라서는 서로 재미있는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자신이 읽고 있는 만화책 내용이 엄청 재미있다거나…).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거나 하루 중에 재미있었던 사건 사고 미담 등을 주고받습니다. 아이들 얘기를 들어주다 보면 텔레비전 9시 뉴스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최근 우리 집의 재미있는 뉴스'는 인상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버스차표가 없어 걸어왔는데 바람이 엄청 심해 2년 전 제주도의 '용눈이 오름'을 올라갔을 때가 생각났고 집에 돌아와 가방을 뒤져보니까 차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기장에다가 별 이유도 없이 '선생님을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라고 적었다는 것입니다.

책 읽기가 따분하거나 강의하는 일이 별로 재미없으면 아주 가끔씩 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음악 시간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랬습니다. 갑자기 안방 보일러가 고장이 나 군불을 지피는 사랑방 신세를 졌습니다.

사랑방에는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가 있습니다. 우리 네 식구는 인터넷을 통해 좋아하는 노래들을 찾아 들었습니다.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기분이 좋아 담가 놓은 솔방울 술을 소주잔으로 한 잔쯤 따라 마시고 있는데 인상이 녀석이 다가왔습니다.

"아빠 이거 뭐여?"

'야 임마, 그거 마시면 안 돼' 하기 전에 녀석은 반쯤 남은 술을 한 입에 탁 털어 넣었습니다. 아빠에게는 소주 반잔에 불과했지만 열 살 먹은 십대(?) 녀석에게는 '독주'였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건강체질인 밥돌이 녀석이다 보니 끄덕 없었습니다. 되레 기분이 아주 좋았던 모양입니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녀석이 춤까지 추었습니다.

녀석이 술 한 모금을 더 마셨다가는 딱 두 번 가보았던 노래방에 가자고 졸라댈 판이었습니다. 큰 아이 인효 녀석도 덩달아 신나서 춤을 추었고 그런 녀석들의 모습에 신바람이 난 아빠인 나 역시 어설픈 춤을 추었습니다. 아내는 '저 양반이 왜 저러나' 싶었는지 깔깔깔 웃었습니다.

그렇게 노래하고 춤춰가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아내가 찬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참, 니들 내일 시험 본다고 했지?"

그 날요? 날 저문 지도 한참이고 밤도 어지간히 깊었는데 시험공부는 무슨 시험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냥 신나게 '음악 공부놀이'를 하다가 잠을 잤지요. 그리고 그 다음 날 밤, 인상이 녀석이 그럽니다.

"아빠, 우리 어제처럼 술 한 잔 하고 노래하면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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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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