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39

남한산성 - 호랑이가 울다

등록 2005.03.15 17:04수정 2005.03.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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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래 너한테 미안할 따름이야. 하디만 어쩔 수 없어.”

새벽녘, 암문으로 들이밀어진 계화는 이진걸에게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자신을 다시 성안으로 놓아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이진걸로서도 사실은 죽여야 할 계화를 살려서 놓아주는 셈이라 그러한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랑캐 놈들의 노리개로 날 던져 놓을 셈이면 차라리 여기서 날 베어 죽이시오!”

계화는 발악하듯이 소리쳤지만 이진걸은 씁쓸히 웃음 지을 따름이었다.

“내래 어린아이와 여자는 베딜 않아. 니래 여기 있으면 골치 아파할 사람이 많으니 산길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라우. 그러면 오랑캐들을 비켜갈 수 있을디 모르니까.”

이진걸은 무심히 한마디를 남겨두고선 문을 닫아 버렸다. 계화는 한참 동안 멍하니 문을 바라보며 혹시나 누군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진걸이 계화를 보내며 옷가지와 먹을 것을 챙겨주긴 했지만 넉넉하지 않아 한시라도 바삐 길을 서둘러야만 할 판이었다.

‘성 아래에서 도와 달라 소리라도 질러볼까?’


이진걸의 말로는 그렇게 해 보아야 성안 군졸들은 함부로 성문을 열어 구하지 않을 것이고 혹시 들어오더라도 자기 패거리들이 곳곳에 있으니 얼마 못 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 했다.

‘오랑캐 손에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그게 낫지 않겠는가?’


계화가 암문에서 등을 돌리고 망설이는 사이 문이 슬쩍 열리며 누군가 활을 겨누었다. 계화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시름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으헉!”

짤막한 비명소리에 놀란 계화는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암문에서 활을 든 사내가 미끄러지듯 무너져 내렸고 이진걸이 피 묻은 칼을 쓰러진 사내의 옷자락에 닦으며 계화를 노려보았다.

“이럴 줄 알았디...... 넌 왜 아직 거기 있는 게야? 어서 가라우!”

그제야 계화는 이진걸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음을 깨달았지만 고맙다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허둥지둥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잔소리 좀 듣겠구만.”

이진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죽은 사내의 시체를 암문 밖으로 끌어내어 놓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정신 없이 내달리던 계화는 그만 나무 등걸을 헛디디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니 새벽인데도 눈앞이 훤했다.

‘무슨 일이지?’

계화가 본 것은 횃불이었다. 한 무리의 조선군이 창과 칼을 들고서는 횃불을 들고 흩어지는 청나라 군사를 이리저리 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이만 하면 됐다! 모두 성으로 들어가라!”

계화가 도움을 청할 사이도 없이 조선군은 재빠르게 성벽 한쪽으로 몰려갔고 바닥에는 수십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어지러이 죽어 있었다. 계화가 용기를 내어 그곳을 지나가려 하는 순간 등에 화살을 꽂은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려져 있던 청나라 병사 하나가 발목을 잡았다.

“살려줘......”

계화의 귀에 또렷이 여진어가 들려왔다. 계화는 놀란 나머지 발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병사는 계화의 발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떻게 도우면 되겠소?”

병사는 계화의 능숙한 여진어에 안도했는지 화살을 뽑아달라며 등을 가리켰다. 계화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화살을 빼내었다. 화살은 그리 깊이 박히지 않았지만 병사는 좀처럼 두발로 일어나지를 못했다. 계화가 자세히 살펴보니 화살에 맞은 상처보다는 머리에 난 상처가 더 심해보였기에 병사의 옷자락을 찢어 동여매어 주었다. 그 때 청나라 기병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진지로 들이닥쳤다.

‘이젠 어이 하면 좋을꼬!’

계화는 다가오는 청나라 기병을 망연자실 바라보았고 청나라 기병들은 계화가 알아듣지 못하는 만주어로 무엇이라 소리치며 말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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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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