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우울한 미래

부유한 노예(김영사, 오성호 옮김) -'The future of Success'

등록 2005.03.19 11:55수정 2005.03.1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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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이히(Robert Reich. 라이시라고도 한다)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클린턴 집권 1기 때 어느 노동부 장관이 가족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장관직 그만두고 나갔던 일이 있었다.

그냥 해외 토픽, 가십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이 책을 썼다. 책에 실린 저자의 소개로는 '미국 민주당 좌파를 대변하는 진보적인 정치경제학자' 그리고 '오랜 친구 클린턴의 첫 번째 대통령 당선과 함께 경제정책 인수팀을 이끌었고 새 행정부의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이란 식의 설명이 있다. 그래, 민주당 좌파라는 건 어떤 건가? 궁금해지지 않는가?


읽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 안 된 다음부터 계속 드는 생각은 '그래, 공무원을 하고 살면 굶어죽지 않겠군‘'이란 것이었다. 저자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의 디스토피아적 성격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읽어나가는 과정 내내 매우 암담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future of Success'이다. 한글제목은 서로 상치되는 이미지를 가진 두 단어의 조합인데 반해서, 영어제목만으로 봐서는 그 미래가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르도록 제목을 잡은 것 같다.

현재 (클린턴 집권 중-말기의 신경제 호황시기)의 가시적인 성공이 무엇을 대가로 진행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그 미래는 -우리(일반 미국인 중산층)가 선택하는 현재의 결과는- 어떠한 것인지 스스로 깨달아 보라는 식으로, 다소 시니컬하게 잡은 제목이라 하겠다.

대충 두 가지 주장이 인상에 남는다. 한마디로 각박해져 가는 현실은 - 미국 기준으로 노동시간이 증가하고 있고,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증가된 부(가구당 평균소득의 증가)의 결과라는 이야기, 즉 지금의 신경제 트렌드는 일반인들 개개인의 성공과 부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들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가 이 책에서 반복되고 있다.

과거보다 젊은이들부터 '인생의 의미, 사랑, 정의'같은 덕목보다는 '성공과 더 높은 소득'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그를 위해서 중상위 계층의 노동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으며(유럽은 물론, 일본보다도 길다고 하니), 과거의 사적 서비스는 점점 더 화폐로 교환되는 공적 경제활동이 되어간다는 이야기,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나 <소유의 종말>에서도 언급되는 소득과 계층에 따라 심화되는 사회의 경제적 그리고 공간적 구분현상을 (사적인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일반인들의 입장, 그리고 드러커의 이론들에서 많이 이야기되는 자기 개발과 조직 능력 배가를 위해 점점 더 일중독(workholic)에 빠져들게 되는 역시나 일반인들의 흐름. 그런 이야기들이 모두 모여서 귀결되는 주장이, '바로 당신이 이 신경제의 부와 종속을 일으키는 원인이다!'란 것이다.

굳이 닭이냐 달걀이냐를 따질 필요도 없이, 정책이나 정치철학, 그리고 지배층의 지도와 기획, 그리고 음모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개인의 입장/선택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보면, 민주당 '좌파'라는 수식어에 대해 쉽게 심정적 동의가 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이념/철학적인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로 인상이 깊었던 구절 역시 개인적인 선택과 해결을 위한 고민제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처럼 여유를 잃어가는 현대인들도, 막상 세상을 뜨게 된다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될 텐데, 아마 그 누구도 '내가 젊을 때 좀 더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와 같은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대부분이 가족과 애인과 지역사회와 자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란 이야기이고, 그걸 고려하면서 현재의 선택을 결정하라는 주장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얘기였고, 장관직을 버리고 가능한 적은 노동시간의 직업을 가지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한 저자(그래도 만만치 않는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하는데)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문구였다고 본다. 하지만, 그 역시 '개인에게 양자 사이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구조적으로 뭔가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인지. 그냥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발상수준에서 머무른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공무원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측면만을 보더라도, 가볍게 폄하할 수 있는 책은 절대 아니다.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꽤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직장인과 헤드헌팅, 강남의 요새화, 벤처와 M&A, CEO 브랜드 가치의 증가, 그리고 실업과 비정규직 증가. 미국사회나 한국사회나 신자유주의적 성격은 크게 다른 게 없을 터이다.

부유한 노예

로버트 라이시 지음, 오성호 옮김,
김영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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