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 고양이'가 들려주는 유쾌한 이야기

<책으로 읽는 세상 9> 황인숙의 <인숙만필>을 읽고

등록 2005.03.16 13:07수정 2005.03.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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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산책
한두 해 전이던가. <옥탑방 고양이>이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한국에 있을 때에도 TV 드라마와는 담쌓고 지냈으니 당시 뉴질랜드의 새내기 이민자였던 내가 그 드라마를 보았을 리가 없다. 당연히 나는 그 드라마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며칠 전에 황인숙 시인의 산문집 <인숙만필>을 읽고 있노라니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이 자꾸 떠올랐다.


이 책의 몇몇 글에 의할 것 같으면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바로 옥탑방이며, 그녀의 등단 작품은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제목의 시였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가 혹시 황인숙의 작품이거나, 아니면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녀를 모델로 삼아서 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확인해 보니, 원작자도 다르고 내용도 '현실에서 꿈을 찾는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다. 다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만필>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여전히 '옥탑방 고양이'를 떠올린다. 서울의 남산 가까운 동네의 한 옥탑방에 혼자 살면서 오롯하게 즐기고 있는 '은자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그녀의 산문집에서 읽은 탓이다. 마흔이 훌쩍 넘은 황인숙은, 그녀가 이십대에 쓴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시에서 열렬히 희망했던 것처럼, '툇마루에서 졸지 않'고 '사기 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고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한 마리 고양이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숙만필>은 그 '옥탑방 고양이'가 들려주는 매우 유쾌한, 그러면서도 자주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산문집이다.

2.

<인숙만필>이라는 책의 제목은 김만중의 <서포만필>에서 따온 것인데, 만필(漫筆)이라는 글자 뜻 그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쓴, 우스꽝스러운 글'들을 묶은 것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황인숙은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김만중의 '만필'에 겸손의 뜻이 배어 있는 것처럼, 황인숙의 이 고백에도 역시 겸손이 배어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우스꽝스러운 글'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숙만필>을 읽으면서 나는 많이 웃었는데, 그것은 글이 우스꽝스러워서가 아니라 글에서 만나게 되는 황인숙의 솔직하고도 엉뚱한 면모 때문이었다.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가볍고 유쾌한, 그리고 그녀의 기발함에 찬탄하는 마음이 반쯤 섞여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예컨대 다음의 글들에서 그랬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잘한 일 열 가지 중 하나는 휴대폰을 장만하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 예정이다. (25쪽, '농담')

내 수첩에는 '1. 파워 2. 기다림(모래시계가 없어질 때까지) 3. 시작 누름 4. 한글 97 누름 5. 끌 때는 오른쪽 끝 X를 누른다. 그 다음 시스템 종료 누르기'가 있다. (38쪽, '수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세 가지')


2년만에 체중계는 마치 내가 네 살 난 어린애를 업고 올라서기라도 한 듯 낯선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울적한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찌나 울적한지 이 울적함의 무게만도 5킬로그램은 더 나가는 것 같다. (32쪽, '성 발렌타인 데이의 문상')

이제 나도 어른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내가 이미 어른인 걸 깜빡 잊고 모르는 사람 중 내 또래를 만나면 어려워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다가, 아, 나도 꿀릴 거 없는 나이지, 힘을 낸다. (96쪽, '깊어가는 가을')


아직껏 휴대폰이 없고 컴퓨터도 다룰 줄 몰라 원고지에 글을 쓰는, 보기 드문 '옛인류' 중의 한 사람인 황인숙의 이 솔직함과 엉뚱함은, 자신이 나라 국(國)도 쓸 줄 모르는 한자맹임을 고백하고 있는 글 '한자 오디세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여기에 자기 이름자인 맑을 숙(淑)을 엉뚱하게 조합해서 쓰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일화는 가히 압권이다. 그러고도 그녀는 "커밍아웃이란 때로 좋은 것이다. 이렇게 내놓고 한자맹임을 밝히니 세상 두려울 게 하나 줄었다"고 오히려 당당하다.

숨길 것도, 주저할 것도 없는 이 당당함이야말로 황인숙의 글들이 재미있게 읽히는 힘인데, 이 책의 발문을 쓴 고종석은 이를 '기품'이라고 달리 말하고 있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쓴' 글들인데도 아줌마의 수다에서 흔히 느껴지는 경박함이나 저자거리의 잡설에서 흔히 발견되는 천박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녀가 지니고 있는 이 기품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기품 있는 그녀의 글은 꼭꼭 씹어먹어야 하는 밥과도 다르고, 씹지도 않고 후루룩 마시는 국수와도 다르다. 소화하기 어려운 난해하고 관념적인 에세이도 아니고 아무 생각할 것도 없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그런 잡문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숙만필>의 글들은 황인숙이 몹시도 좋아하는 냉면과 참 닮아 있다. 가느다란 면발을 씹지 않고 후루룩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함께 넣은 오이ㆍ무채와 편육과 곁들여 먹을 때는 꼭꼭 씹지 않으면 안 되는 냉면처럼 이 책의 많은 글 역시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야 제 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 제 맛이란 바로 겨자와 식초의 맛이다. 그녀의 글에는 혀가 얼얼할 정도로 톡 쏘는 겨자의 맛처럼 아프게 세상을 꼬집는 비판도 보이고, 잘 익은 사과일수록 단맛보다 신맛이 더 깊고 그윽하게 느껴지듯이 깊게 숙성된 철학도 담겨 있다. 예컨대 다음의 글들에서 우리는 웃음을 그치고 숙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며칠 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다 보니 여기저기 신문지를 깔고 덮고 누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 밤도 머리가 띵할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왜 노숙자들에게 슬리핑백이라도 나눠주지 않는 것일까? 봄이 지나면 도로 거둬들여 세탁해서 보관했다가 추워질 때 다시 주면 되니까 그렇게 많은 비용이 들 거 같지 않은데. 이렇게 겨울이 추운 나라에서 사람을 신문지에 싸서 시멘트 바닥에 버려두다니. 그들에게 '죽어, 얼어, 부활할 거야'라고 농담이라도 건네는 건가? 그들더러 어쩌란 말인가! 한뎃잠이라도 잠은 자야 될 거 아닌가? 불운한 사람들의 유일한 도피처인 잠조차 최소한도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독한가? 우리는 악독한 추위처럼 독하다. 그런 거 같다. '우리'라고 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나는'만은 아닌 것 같다. 죄 없이 벌받는 사람이 많은 겨울이다. 죄 많은 겨울이다. (174쪽, '겨울바람')

웃음이 헤픈 건 좋다. 울음이 헤픈 건 화가 치민다. 미감이 상한다. 내 성질이 이상한 건가? 울음은, 눈물은, 정말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상비약처럼 아껴둬야 한다. 정말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순도와 농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이 돼버려서는 안될 눈물을 위해서. (15쪽, '쓰달픈 인생')


3.

하지만 무엇보다도 황인숙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내가 가장 많이 멈춰 서서 가만히 눈감고 귀기울여 본 곳 역시 바로 그렇게 한 편의 시를 불러낸 문장들 앞에서였다. 유쾌하게 웃느라 활짝 펴졌던 미간이, 얼얼하고 시큼한 냉면의 맛에 찔끔 찔려서 굳어진 마음이, 이 아름다운 문장들 앞에서 다시 단정해지고 부드럽게 풀리곤 했다. 오랜 외출을 끝내고 모처럼 집에 돌아와 따스한 난롯가에 웅크리고 얕은 잠이 든 고양이처럼 말이다.

밤이 사뭇 깊어졌다. 귀뚜라미가 울어대서만도 아니고, 바람이 소슬해져서만도 아니고, 뭐랄까, 한 해 중 이맘 때면 지구의 기울기가 밤 쪽으로 사뭇 기울어지기 때문인 듯싶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밤을 바다라 치면 이맘 때가 밀물 드는 때라는 것이다. 가을, 밤이 만조가 되는 계절. (161쪽, '가을밤 바람이 분다')

높고 맑은 소리로 바람이 분다, 담요를 끌어덮고 누워 바람소리를 듣는다. 추운 날 듣는 바람소리는 막막히, 자꾸 잠으로 굴러 떨어지게 한다. 그렇게 해서 나무들은 혼곤한 잠으로 이 겨울을 나는 것이다. 겨울바람은 겨울나무를 위한 자장가. (180쪽, '겨울나무를 위한 자장가')


이렇게 58년 개띠 '옥탑방 고양이'가 야옹야옹거리며 들려주는 이야기에 취해 3월의 열흘을 보냈다. 가볍고 경쾌하게 그러나 경박하지 않고 천박하지 않게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었다. 그리고 나 역시 한 마리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야옹.

덧붙이는 글 | <인숙만필(仁淑漫筆)> 
지은이/황인숙, 펴낸곳/마음산책, 2003년 5월 1일 1판 1쇄

덧붙이는 글 <인숙만필(仁淑漫筆)> 
지은이/황인숙, 펴낸곳/마음산책, 2003년 5월 1일 1판 1쇄

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마음산책,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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