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달 드라마병을 도지게 했던 SBS 드라마 <봄날>이 20부를 끝으로 지난 일요일 종영했다. 원래 12부작으로 기획된 것이 20부로 늘어지면서 초반의 신선함을 잃고, 개연성 없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봄날>이 같은 SBS 드라마인 <파리의 연인>이나 <발리에서 생긴 일>과 달리 이 드라마가 '뜰 수' 없었던 이유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개인의 기억과 관계에 대한 물음을 나름대로 집요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연인의 동생을 사랑하게 되는 설정 또한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겉으로 삼각관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드라마의 공식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단지 그뿐, <파리의 연인>이나 <발리에서 생긴 일>과 달리 <봄날>의 '삼각관계'는 꽤 물렁물렁하다.
정은의 사랑이 은호에서 은섭에게 옮겨가는 과정이 뚜렷하게 묘사되지 않으며, 은호와 은섭은 여느 남자주인공들처럼 한 여자를 놓고 '격렬한' 몸싸움조차 벌이지 않는다. '연애자금' 풍부한 재벌 2세들의 로맨스는 대중의 소비욕구를 자극할 만큼 화려하고 방종했지만, <봄날>에서의 로맨스는 지극히 정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소박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봄날> 주인공들의 감정선에는 '비물질적'인 것이 주효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물질성'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가시적이지 않다. 이전 트렌디 드라마가 주로 '보여지는 사랑'에 초점을 맞춰, 마치 영화 <귀여운 여인>이 주는 재미처럼, 온갖 상품들이 소비되는 대중심리를 자극했다면, <봄날>의 연애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드러남'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상당히 밋밋해 보이기 쉽다.
그런 면에서 <봄날>은 본질적으로 성장드라마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 정은(고현정 분)이 은섭을 사랑하게 되는 감정의 밑바탕에는 어머니의 부재에 의한 심리적 외상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깔려 있다.
정은의 이러한 외상은 은호(지진희 분)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슬픔을 공유했기 때문에 서로를 그리워하고 애틋해 한다. 은호는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에 정은을 투사하고, 정은 또한 자신의 실어증을 낫게 해준 은호를 '세상에 낳아주신 어미'에 은유한다.
어머니를 닮은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닮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해서 그게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은과 은호에게 있어 '부재한 어머니'에 대한 상처는 이들의 삶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은과 은호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에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 정은과 은호가 '부재한 어머니'를 인정하고 그를 극복하기보다는, 비슷한 대체재로 그 부재를 메우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즉, '없음' 혹은 '잃어버림'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그 빈 자리에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는 집착을 낳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인의 기준'을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볼 때, 애써 어머니의 부재를 망각하고 그를 대체할 무엇을 필요로 하는 한 정은과 은호는 영원히 유아기적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반면 은섭(조인성 분)은 '찌질이'로 불리던 시기에서 점점 벗어나는데, 그 동력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 있던 데서 유래한다. 오랜 세월 은섭의 성장을 방해하던 것은 히스테릭한 어머니에 대한 그의 연민이었다. 엄마로 테두리 지워지는 내부세계 속에서 침잠하던 은섭은 섬에서 날아온 정은이라는 외부세계를 통해 긴 잠에서 깨어난다.
그래서 은섭은 말한다. "당신(정은)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과 엄마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정은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이는 은섭에게 있어 위대한 발견이다. 자아를 둘러싼 내·외부 세계가 드디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엄마 품의 세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바깥 세상을 인지하고 또한 자아를 되돌아본다. 그동안 은섭의 시야를 가리던 '엄마의 착한 아들'이라는 주문은 풀리고, 은섭은 점점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차 재정립해 나간다. 그리고 이는 은섭이 외부세계로 눈을 돌리기 위한 도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날>은 참으로 아쉬운 드라마다. <모래시계>에서처럼 스케일은 크지 않지만 훨씬 섬세한 감정 표현을 요구하는 이 드라마에서 큰 무리없이 연기를 해낸 고현정과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여준 지진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기량은 실제 이하로 묻혀졌다. 오랜만의 대작 드라마를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처음의 예민한 긴장감이 후반부에 너무 느슨해졌다. 그건 바로 <봄날>이 취한 어중간한 노선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새롭지만, 플롯은 (한국에서) 고전적이다.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들 가령, 조폭의 난데없는 혈투극, 룸살롱 문화 등의 투입과 함께 등장인물들의 부정확한 발음 처리, 빈번한 사건 사고 또한 문제적 요소로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세간의 평가와 달리, <봄날>의 정은과 <모래시계>의 혜린이 전혀 다른 인물이듯, 이를 연기한 고현정 역시 다른 모습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굵직굵직하게 스토리가 전개되었던 <모래시계>에 비해, 비교적 한정된 시공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봄날>은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감정 연기가 필수였다. 고현정은 울다가 웃는 행위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정은의 심리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아마도 그가 '자연미인'이라, 얼굴 근육을 비교적 잘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억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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