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44회

등록 2005.03.22 07:35수정 2005.03.2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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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아직 서편에 걸려 있을 것이지만 산중의 초막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내렸는지 모를 초설(初雪)이 내려앉는 어둠을 안타깝게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움직임에 따라 간간이 느껴지는 상흔의 고통을 참으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생각은 정리했지만 패배의 찌꺼기는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한번의 패배로 내팽개쳐 버렸던 삼년의 삶.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로 하였는데 또 한번의 패배는 또 다시 삶을 버리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사치였다. 그렇다.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 특별히 자부심을 가진 바도 없다 했지만 그것은 자기기만(自己欺瞞)이었다.


풍운삼절과의 생사 결도 그의 위명을 높여 놓았다. 더구나 태극산수의 오의를 깨우친 이후 그는 무당의 현진과 소림의 광무선사와 손속을 나누었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감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독혈군자와의 겨룸에서도 역시 밀리지 않았고, 청마수 호광과의 생사결에도 그는 우위를 점했다.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은근히 자만심을 가졌던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부족하고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자신은 이토록 깊은 패배감의 상처에 빠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자조적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수련(修練)에 있어 가장 큰 적은 바로 자만심이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는 자족감(自足感), 최소한 누구에게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만심이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다.

첫 번째 패배의 고통도 그랬다. 십이년간 밤잠을 줄여가며 익혔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깨어지자 그의 삶을 팽개치게 했던 것이다. 두 번씩 그럴 수는 없었다.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패배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다. 그는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에 들어갔다.

강명이란 사내가 말했던 것처럼 중원을 떠나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자신을 벨 수 없게 강해져야 한다. 강명이란 사내가 자신을 벨 수 없도록 강해져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 그는 이 중원을 떠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었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백련교도였던 친구로 인하여 초혼령에 의해 사라졌던 인물이 다시 나타났다…?”


풍철영은 자신이 아는 그 누군가에게 섭장천에 대해 조사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 누군가는 섭장천에 대해 자세히 알려왔다. 그제야 그는 섭장천 일행이 신검산장에 들어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마주 앉아 있는 조국명을 바라보았다.

“몇 명이던가?”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조국명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부로 들어와 움직이고 있는 자들은 운향소축에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여섯 명입니다. 그 중에 흑모전서 균달도 끼어 있습니다. 외부에 그들의 조력자는 십여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는데 늘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풍철영에게 보이는 조국명의 태도는 너무나 공손했다. 그것은 장주와 총관과의 관계 이상의 태도였다. 조국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들어 와 염탐하고 있는 자들은 섭장천 일행과 한패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손을 쓰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능력은 예상 밖이어서 진식(陣式) 만으로는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기에는 한계에 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균달은 보기보다 특이한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조국명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풍철영은 오히려 미소를 띠워 올리며 조국명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있지 않나.”

그 말에 조국명 역시 미소를 띠웠다. 하지만 그가 웃자 지금까지의 온화한 그의 모습 대신 기이할 정도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풍철영의 말은 이제 자신이 손을 써도 된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그는 십여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자신의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조용하게 처리하게. 상황에 따라서는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필요도 있지만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은 곤란해. 더구나 너무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하는 것도 주인 된 도리는 아니지. 예의를 모르는 손님은 한번쯤 야단칠 필요도 있어. 그렇지 않은가?”

풍철영의 말뜻을 모르는 조국명이 아니다. 그가 장주와 함께 한지 벌써 이십오년이다. 그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 그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주는 경고는 하되 그들이 따지고 들지 못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점점 초조하게 만들어 발작을 일으키게 하고, 종래에는 제풀에 지쳐 무릎을 꿇게 하라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조국명의 얼굴에는 아직 미소가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철혈보에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인가?”

“이미 모두 파악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육능풍을 비롯해 일곱명의 정예가 백양각에 머물고 있고, 이곳의 외부를 감시하는 인원 역시 수십명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장주님께 약속한 바 있어 손을 쓰고 있지 않지만 오늘 새벽 외부 감시 인원 하나가 매화검법을 쓰는 자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제 재미있게 되는군.”

이미 예상했다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자신의 전갈을 받고 달려오는 광지선사 일행이 당도하기 전에 일단 급한 일을 끝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을 진행할 것이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화산의 화심검 화웅이 오늘 들렀다고?”

“섬뜩할 정도로 살기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청마수 호광과 흑마조 형가위가 이 안에 있는지만 물어 보고 다시 떠났습니다. 곧 돌아올 것으로 보입니다.”

풍철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화웅은 지금 쥐새끼를 쫒다가 오히려 쥐새끼에게 물린 고양이의 신세다. 그가 허둥대는 것은 불필요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자칫하면 육능풍 그 능구렁이가 장난을 칠지 모르겠군. 피곤한 일이야. 금창약이나 많이 준비해 두는 게 좋을게야.”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국명은 풍철영이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금창약은 병기 등에 상한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다. 그것이 많이 필요하다 함은 다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조국명의 생각은 풍철영과 달랐다. 굳이 이쪽에서 금창약을 준비해 둘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들 서로 간 많이 준비했을 테니까….

“내일 도착한다고 했지?”
“내일 오후 정도면 도착할 것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육능풍은 가만있을 위인이 아니야. 아주 재미있겠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풍철영의 얼굴에 미소가 걷혔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탄식을 터트렸다.

“휴… 우… 힘들군. 오늘부터는 사관(絲關)을 발동시켜 놓는 것이 좋겠군. 쥐새끼 한 마리 정도는 때려잡는 것도 좋아.”

그의 수심에 찬 얼굴을 보는 조국명의 얼굴에도 근심이 떠올랐다. 그는 동생에게 가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장주의 동생 풍철한은 강한 사내였다. 그리 심하지도 않은 부상에 도착하자마자 혼절을 하고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장주의 사문인 무당에 연락을 한 것도 그 시기였다고 생각했다. 동생과는 달리 장주는 사문과도 연락을 자주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기억으로는 사문에 어떠한 도움도 청한 적이 없었다. 조국명은 지하로 향하는 장주를 바라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냈다.

사관(絲關)이 발동되면 그들이 돌아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그들은 사관을 느끼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장주가 말한 예의 없는 손님을 야단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몰랐고 또한 자신에게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36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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