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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과 파란 기와지붕이 나란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었던 그곳, 남편이 나고 자란 40년 동안 '소유'를 인정해주는 문서 한 장 없었던 그곳.
폭발하는 용암의 열기마냥 한낮의 태양은 깊은 밤이 되어도 식을 줄 모르고, 장마가 시작되고 거센 빗줄기가 세상을 때려 댈 때면, 집안 곳곳엔 옹기종기 양동이며 두꺼운 수건들로 그 비를 맞이했던 그곳.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하루 종일 귓가를 윙윙거리는데도 두꺼운 이불로 시린 어깨를 감싸야 했던 그곳,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창문을 열어 맑은 공기와 묵은 공기를 바꾸어 주는데도 언제나 예민한 후각은 퀴퀴하고도 습한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곳.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아 한낮이지만 시계가 멈춰버린 듯 캄캄한 밤은 새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침묵하고 있어야 했던 그곳, 가뿐 숨을 몰아쉬며 언덕배기를 한참 올라가면, 그 언덕배기 밑으로 파란 기와를 얹어 놓았던 무허가집이 바로 그곳은 바로 저의 시댁이었습니다.
결혼 초, 아침저녁의 출퇴근을 불사하며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쓸고 닦는 게 하루 일과였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갔지만, 집안 어느 구석에도 제 구슬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벽엔 곰팡이가 화려한 그림을 그려댔고, 비라도 내리는 날엔 눅눅함과 습함으로 여러 종류의 벌레들이, 안식처를 찾는 건지 먹을거리를 찾는 건지 알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명절 대이동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를 괴롭힌 것은 연로하신 시부모님의 건강이었습니다. 하찮은 식물 하나도 햇볕을 받아먹어야만 뿌리를 튼튼히 하고 줄기를 살찌우는데, 40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그 집과 함께 아침을 맞고 저녁을 마감하셨으니 건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가끔 잡지에서 동화 속 주인공이 사는 집처럼 햇볕 잘 드는 근사한 집을 보노라면, 그날 밤 꿈 속에서는 어김없이 시부모님, 남편과 함께 동화 속 그 집 앞마당에서 햇볕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전, 마침 그곳 일대가 재개발이 된다는 소식이 무성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허가 집이니 재개발이 된다하여도 딱히 보상을 받을 수도 없을 것 같았고, 막상 집을 철거한다면 당장 부모님의 거취가 문제였습니다.
결혼 3년차. 아직까지 달셋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자식 입장에선, 그런 고민으로 인해 하루하루 숨이 막혔습니다. 하지만 뭔가 결정을 내려야 했기에, 우선 부모님께서 사시던 무허가 집을 복덕방에 내놓았습니다.
복덕방에선 서울변두리에 방 한 칸짜리 전세를 얻을 수 있는 정도의 값을 이야기 했습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사흘 밤낮을 궁리에 또 궁리를 하였습니다. 해서 결론이 난 것이 부모님께 집을 장만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장남으로서 언젠가는 부모님을 모셔야 할 터. 계획대로 차근차근 준비하여 집을 장만하기로 한 우리의 계획을 뒤집어 미리 집을 장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리가 잘려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졸라매는데 까지는 졸라맬 것을 우리 부부는 두 손을 꼭 붙잡고 다짐했습니다. 하여 그 무허가 집을 판 돈에다 20년의 긴 융자를 얻어 결국 시부모님께 작은 빌라 한 채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집 장만을 위하여 꼬박꼬박 들어가던 적금을 융자금 갚는 것으로 대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을 들고 집을 산 게 아니라, 우선 외상으로 집을 사고 집값을 갚아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사고 나니 다른 여러 가지 문제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선 눈에 띄게 변화한 것이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의 대폭적인 인상이었고, 남편의 소득은 저소득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건만 저소득층 자녀에게 주는 보육료 감면 혜택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건, 20년 동안 빚을 지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인생의 삼분의 일이란 긴 시간 동안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네 현실이 빚을 안 지고 집을 살 수 없는 형편이라 대부분이 융자를 안고 집을 사지만, 빚에 대한 부담감은 지금도 가끔 가슴을 옥죄어옵니다. 우리 인생이란 것이 내 이름 석자가 뚜렷하게 적힌 집 문서 한 장을 마련하느라고 전쟁터 같은 이 현실에서 안달복달 하는 것 같아서 참 씁쓸합니다.
하지만 그 집이 제게 부담감만을 안겨준 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을 제게 안겨 준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낮에는 햇볕이 온 집안으로 부서져 내려, 여름과 겨울을 적절하게 느끼게 해주었고, 아무리 비가 내려도 안식처를 찾는 다른 생명들은 절대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햇볕은 분명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명백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연로한 육신이지만 태양의 거름이 보태어진 탓인지, 시부모님의 두 얼굴에는 발그레하게 화색이 돌았습니다. 온갖 잔병들이 떠난다는 예고 한 마디 없이 자취를 감췄음은 물론 입니다.
또한 기관장의 도장이 화려한 꽃무늬처럼 찍혀 있는 그 종이 한 장이 무엇이라고, 몇 평 되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당신만의 완전한 소유를 인정해주는 집 문서를 시도 때도 없이 종이가 뚫어져라 들여다보시는 시아버님. 그리고 눈감기 전에 40년 무허가의 한을 푸셨다며, 철없는 아이처럼 기뻐하시는 시어머님의 그 감격어린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도 고귀한 행복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울 때, 매달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목돈으로 지출되는 그 융자금을 볼 때마다 심장은 조여들 대로 조여들지만, 그래도 햇살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보금자리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시부모님 생각을 하면, 어느덧 조여들던 제 심장에도 금가루 같은 봄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져 내립니다. 모쪼록 시부모님께서 새로 마련해드린 보금자리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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