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가장 개혁적인 굴뚝을 보았다

충북 옥천읍 국제농기계(株) 굴뚝 이야기

등록 2005.03.25 14:02수정 2005.03.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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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있어 '개혁'이란 말처럼 절실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화두가 또 있을까. 오랜 독재와 그 겨드랑이 아래서 마치 독소처럼 기생해 왔던 권위주의가 남긴 모순과 폐단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버티고 있다.


알게 모르게 사람살이를 억압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절차와 악법들을 시급히 척결하고 적어도 다시는 기본이 거꾸로 선 나라를 만들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목전의 현실은 그런 우리의 기대치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지만 그 누구도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다. "세월아, 너 가냐? 난 그냥 여기서 놀란다"라고 우리가 뽑은 선량들은 '시간 죽이기'로 버티며 누구도 악법개폐에 방울을 달려고 나서지 않는다.

애써 방울을 달지 않으려는 쥐들에게까지 직무유기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인간의 횡포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등 악법철폐에 떨쳐나서야 할 선량들의 직무유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보건대,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가장 큰 비극은 자신들 스스로가 개혁의 인자이자 개혁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웃기는 짬뽕'이 있다더니 혹 여의도에 가면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개혁 작업은 전혀 진전이 없으되, 개혁이라는 말만 허공에 둥둥 떠다니다 보니 이젠 개혁이란 말처럼 진부한 말이 세상천지에 또 있을 것 같지 않게 돼버렸다. 진부하다 못해 때론 피곤하고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혹시 지금이 개혁이란 말을 개혁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내킨 김에 노래의 원래 주인인 패티김 여사껜 '쪼까 미안헌 일이지만, 그분의 노래를 아주 쪼깨만' 비틀어 보기로 한다.

개혁이란 두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개혁이란 두글자는 슬프고 행복하고


개혁이란 두글자는 쓸쓸하고 달콤하고
개혁이란 두글자는 차가웁고 따뜻하고

개혁하는 기쁨에 태양이 빛나고
개혁하는 슬픔에 달빛이 흐려지네(오예!!)


충북 옥천 국제농기계(주) 굴뚝
충북 옥천 국제농기계(주) 굴뚝안병기
어제 개인적 용무로 충북 옥천읍에 갔다. 옥천역 뒤를 지나갈 때였다. 근처 국제농기계(株)의 수상한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공장의 높다란 굴뚝에 쓴 글귀가 내 눈에 힘을 주어 초점을 한 데 모으게 만들었다.

'서슴없이 개혁하자'

아아, 참으로 통쾌한 저 한 마디. 영창 피아노 소리 이래로 이처럼 '온 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를 듣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무한감동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개혁적인 굴뚝을 발견한 기쁨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어제 내가 옷을 약간 얇게 입었던가!).

보라, 그토록 사려 깊고 똑똑하다는 국회의원들조차 개혁에 맘부림, 몸부림치는 시늉만 내고 있을 때 무생물인 저 굴뚝만이 홀로 분연히 일어서서 목 놓아 개혁을 외치고 있지 않는가. 아득한 정신을 가다듬어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전후 사정을 볼 것 없이 찰칵,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나서 난 제자리에 오래도록 멈춰 서서 국제농기계(株) 굴뚝에 새겨진 글씨들의 변화무쌍한 변주를 지켜보았다.

"(누가 뭐래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천지개벽이 온다쳐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딴나라 굴뚝이 아무리 방해할지라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눈발이 점점 거세게 휘날리고 있었다. 굴뚝의 글씨가 또 한 번 꿈틀했다. "비가 와도 개혁하고 눈이 와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굴뚝 쪽으로 좀더 바짝 다가가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아니, 임자 있는 굴뚝과 통하기라도 했소? 왜 이마에 주홍글씨처럼 써 붙이고 서 있으시오?"

"이보시요, 길손 양반. 가던 발걸음 잠깐 멈추시고 이내 말쌈 좀 들어보소. 옛날, 호랑이가 신탄진 담배, 거북선 담배 필 적에 난 왼종일 시꺼먼 연기에 몸을 맡긴 채 청춘을 흘러보냈소.

누구는 자기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고 설레발을 치는 것을 내 들었소이다만 내가 바로 그짝 났소. 몸은 비록 땅에서 일하지만 마음은 늘 하늘을 지향했드랬소. 그 점은 인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오.

그러다가 호랑이가 거북선 담배를 피기 시작했소. 그땐 나도 쫌 폼나게 살게 됐나 싶었지. 고걸 2차 산업인라등가 뭐라등가 허드만. 얼굴도 깨끗해지고, 살결도 보드라와지고 막 살만하다 싶응게 금방 무슨 정보화산업 시대가 왔다잖소. 연기 없는 산업이라등가 뭔가 해쌓더구만.

우리 굴뚝도 이젠 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인갑제. 왜 사람들만 개혁을 전세냈당가, 특허를 냈당가? 인자 우리네 굴뚝도 개혁해야 산다는 생각이 굴뚝같단 말이오. 시방 내 말이 뭔 말인지 알아 묵것소? 왜 굴뚝이 개혁 얘기 꺼내면 불온해서 국가보안법이라도 걸린다요?"


나는 굴뚝이 더 흥분하기 전에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누가 그 따위 소릴 허고 댕긴다요? 내 오랜만에 님의 주옥같은 이야기를 듣다보니 잠깐 넋이 나간 모양이지라우. 아먼, 굴뚝님 야그대로 서슴없이, 이짝 저짝 눈치보지 말고 개혁해야지라. 사람과 굴뚝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요."

순간 굴뚝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머물다 갔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만이라. 내 듣자 허니 인간 세상에선 지금 개혁이 지지부진하다 들었소. 혹 나그네에게 힘이 있다면 날 여의도 국회의사당 굴뚝으로 채용해 주시면 안 되겄소?"

"보시요, 굴뚝님, 제 맘 같으면사 당근 굴뚝님을 국회의사당 굴뚝으로 추천하지라, 추천허고 말고요. 근디 내같은 무지랭이가 뭔 힘이 있겄소잉? 설령 힘이 있다쳐도 님이 옮겨가는 그 순간 모르긴 몰라도 딴나라 굴뚝들이 들고 일어나 난리 죽일 것이요.

님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서슴없이 개혁하자'라는 글귀 때문이것지라우. 사태가 그러할지니 굴뚝님은 그냥 굴뚝님이 선 이 자리에서 개혁을 전파허고 계시요. 고것도 결코 한찮은 일은 아닐 것이구만이라."

나는 굴뚝에게 후일을 기약하면서 자중자애할 것을 당부하고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세상에서 가장 개혁적인 굴뚝을 만난 나를 축복이라도 하듯 서설이 내렸다. 난 이후로도 오랫동안 저 아름다운 굴뚝을 잊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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