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시민의신문
그렇다면 임종국 선생의 글을 못마땅하게 여긴 검열 당국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임종국 선생의 글을 직접 검열한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한승조는 당시 검열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한승조의 이력 중에는 ‘공안문제연구소 민간 감정위원’ 활동이 포함돼 있는데 그것은 국가보안법 사건 재판이 벌어질 때마다 소견을 발표해 피고인들의 ‘이적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승조는 이장희 교수의 저서 <나는야 통일 1세대>라는 책에 대한 소견서에서 “쥐덫에다 남북한의 평화통일이라는 맛있는 음식을 놓고 그 덫에 걸려드는 어린이들을 낚아채는” 책이라고 ‘악평’을 한 바가 있다. 한승조와 함께 소견서 제출에 참가한 또 다른 인사는 이화여대 김용서 교수와 명지대 이인수 교수이다.
김용서 교수는 작년 3월 한국해양전략연구소 강연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성립된 좌익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에는 왜 군부 쿠데타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고 이인수 교수는 이승만의 양자다.
여기서 잠시 한승조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1969년부터 1995년까지 고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980년 11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 1982년 문교부 정책자문위 국민정신분과 위원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기획처장, 1983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 상임위원,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민족지성’ 발행인, 1985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정신교육중앙협의회 회장, 1985년 한국도덕정치교육연구소 소장, 1997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서평위원회 위원장 등 유독 ‘정신’과 ‘윤리’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두환 정권으로부터는 새마을훈장 협동장(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1986년) 등을 각각 받았다.
이처럼 한승조가 왕성하게 활약하던 당시는 친일이라는 원죄를 가리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가 전가의 보도처럼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던 때였으니 임종국 선생은 사회와 담을 쌓고 후일을 기약하는 심정으로 더욱 친일문제연구에 매진했을지도 모른다. 선생은 생전에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예우는커녕 가족의 생계조차 제대로 책임질 수 없었으나 친일파들의 행적을 기필코 기록으로나마 남기고 말겠다는 의지를 지닌 시대의 등불 같은 지식인이었다.
장준하와 박정희처럼 한 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간 역사의 인물들이 많다. 또한 같은 고장 출신이면서 친일과 항일의 상반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북 영덕의 경우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거물 친일파 문명기와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있는가 하면 경남 밀양에는 일본 국회의원까지 지낸 친일단체 대의당 당수 박춘금과 대표적인 항일 투쟁 단체인 의혈단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 등이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한승조와 임종국 역시 위와 비슷한 예로 언급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친일파들에 의해서 1949년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은 1989년까지 온전히 임종국 선생 개인이 이어왔다고 하면 과연 누가 이의를 달 것인가. 이제 제2의 반민특위가 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4월이면 출범할 예정이며 나아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환수특별법도 이번 임시 국회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29일 임종국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