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스승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겠습니까?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98) <거꾸로 사는 재미>를 읽고서

등록 2005.04.04 00:58수정 2005.04.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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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깃국 같은 선생님의 말씀

a <거꾸로 사는 재미>  겉표지

<거꾸로 사는 재미> 겉표지 ⓒ 아리랑나라

이오덕 선생님!
선생님이 누워 계시는 부용산 멧기슭에도 이제는 지난 겨울에 쌓인 눈이 모두 녹고 곧 진달래개가 피고자 꽃망울이 한창 부풀고 있을 테지요.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쁜지 선생님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데 엊그제 아드님 정우씨가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책을 한 권 부쳐줘서 어제 오늘 선생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책 겉장 그림에는 선생님이 어느 시골길에서 고양이를 안고 있습니다. 저도 요즘 다리가 편치 않아서 하루 종일 집안에서 고양이란 놈과 지내고 있습니다. 한 석 달 그 녀석과 같이 지내자 이제는 제 말귀도 신통하게 알아듣기도 합니다. 동물도 저 귀여워해주는 줄은 용케도 알더군요.

아드님 정우씨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펴낸 책 <거꾸로 사는 재미>는 재생지로 엮었는데, 어느 한 쪽의 빈 곳도 없이 야물게 잘 엮었습니다. 겉장조차도 단색으로 마치 40~50년 전에 나온 책처럼 느껴졌고, 책 속의 담긴 선생님의 말씀조차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한 꼭지 한 꼭지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 댁에서 대접받았던 시래깃국 같기도 하고, 조선무를 듬뿍 넣고 끓인 된장찌개 맛 같기도 하였습니다. 책의 꾸임이나 내용이 햄버거나 치즈에 맛을 들인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맞지 않을 듯합니다.

'하나 - 하늘과 비둘기' 묶음에서는 '미루나무' '흙' '산' '하늘' 따위로 자연을 노래한 글들이고, '둘 - 우리 집 우리 이웃' 묶음에서는 '이발소' '집' '자취' '내가 사는 대곡' '복술이' 따위의 글로 당신 생활 언저리의 이야기들입니다.


'셋 - 가난하게 사는 슬기' 묶음에서는 '거꾸로 사는 재미', '선물', '사라진 농촌 문화', '사람의 길', '자기를 깔보는 교육자' 따위의 글로 사라진 우리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기만 아는 영악한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하게 사는 선생님의 평소 생활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넷 - 꼴찌를 기르는 교육' 묶음에서는 '우리는 왜 사랑을 잃었는가', '우리는 십자가를 진 사람', '어린이 마음', '이 땅의 풀 한 포기라도', '죄인의 말' 따위로 오늘 우리의 병든 교육에 대한 탄식과 스스로의 뉘우침을 드러낸 글들입니다.


선생님을 만나 뵌 것은 일생일대의 영광

a 이오덕 선생님의 무덤 앞에서(왼쪽 아드님 정우 씨, 오른쪽 필자)

이오덕 선생님의 무덤 앞에서(왼쪽 아드님 정우 씨, 오른쪽 필자) ⓒ 박도

산골 학교 숙직실엔 저녁마다 온 직원들이 모인다. 모두가 도시에다 식구들을 두고 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 거의 날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언제 산골에서 벗어나나 하는 것이다.

"난 토요일만 되면 집에 갈 생각에 아침부터 들떠 있어요."
"일요일 오후, 버스를 타고 이놈의 골짝을 들어오는 게 죽으러 오는 것 같이 싫어요."
…… 왜 이들은 자기를 스스로 깔보며 살아가는 것일까?

- '거꾸로 사는 재미'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윗자리와 앞자리를 악착같이 서로 다투며 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경쟁을 수단으로 하는 교육 방식을 좋게 보는 사람의 주장은 이렇다. "그래도 경쟁에서 뽑혀 나오기 때문에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고.

이들은 그 뛰어난 사람만 보았지, 뛰어날 수 없었던 나머지 사람을 보지 못한다. 모두들 볼 능력과 볼 '정신'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경쟁에서 뽑힌 그 몇 안 되는 사람조차 사람으로는 몹시 불행하다고 하겠으니 그밖에 뽑히지 못한 모든 사람의 불행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

경쟁을 그만두면 모두가 꼴찌로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마침내 일등도 꼴찌도 없이 모두가 손잡고 함께 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모두가 함께 손잡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런 때가 오기까지 우리들은 '꼴찌를 위한 교육', '꼴찌를 기르는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 '꼴찌를 기르는 교육' 가운데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훈련시킨 교관이었고, 돈을 거두는 세금쟁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있는 그 끝없이 자라나고 커 가는 재질과 개성을 뻗쳐 줄 줄 모르고 '획일'이라는 몽둥이를 휘둘러 그들을 똑같은 형태로 두들겨 맞추어 온 폭군이었다. 서로 남을 해치는 끔찍한 경쟁을 강요한 깡패였다. 선거운동을 하였던 거짓말쟁이였다.

이것은 남들이 하지 않는 소리를 해서 눈을 끌고, 그래서 나를 한층 올바른 사람으로 돋보이게 하자는 속셈으로 하는 말이 조금도 아니다. 다들 나를 죄인으로 봐 달라는 말이다. 앞으로 나는 이 죄를 얼마쯤이라도 씻고자 있는 힘을 다 할 것이다.
- '죄인의 말' 가운데서


선생님의 말씀 <거꾸로 사는 재미>를 읽으면서 몇 문장 뽑아보았습니다. 읽어가는 틈틈이 제가 좀더 일찍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지난 삶의 길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과, 그나마 뒤늦게라도 선생님을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은 것은 제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a 이오덕 선생(돌아가시기 전 겨울)

이오덕 선생(돌아가시기 전 겨울) ⓒ 박도

저는 선생님에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글은 우리말로 쉽게 써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늘 강조하신 가난과 자연, 그리고 일하기의 중요성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너무 굳은 나이에 배운 터라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제 생각을 바꾸고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미련한 저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당신 가까이 두고자 하였지만 듣지 않다가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저도 강원도 산골로 내려가서 자연을 벗 삼아 지내고는 있습니다만 어찌 스승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의 말씀과 얼이 담긴 책들, 늘 가까이 두고서 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읽고 읽겠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다시 만나 뵈올 때까지 명복을 빕니다.

2005년 4월 4일 지상에서 박도 두 번 절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오덕 선생의 <거꾸로 사는 재미>는 '아리랑나라' 출판사에서 펴낸 책으로 새책방에서는 팔지 않습니다. 헌책방 아벨서점(032-766-9523), 숨어있는 책 (02-333-1041), 인문사회과학책방(풀무질, 02-745-8891)에서나 인터넷 주소창 ‘이오덕학교(http://25duk.cyworld.com 043-857-0090)’나 ‘25duk'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책값 8천원).

덧붙이는 글 이오덕 선생의 <거꾸로 사는 재미>는 '아리랑나라' 출판사에서 펴낸 책으로 새책방에서는 팔지 않습니다. 헌책방 아벨서점(032-766-9523), 숨어있는 책 (02-333-1041), 인문사회과학책방(풀무질, 02-745-8891)에서나 인터넷 주소창 ‘이오덕학교(http://25duk.cyworld.com 043-857-0090)’나 ‘25duk'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책값 8천원).

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지음,
산처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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