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목련안병기
교실 창밖에선 하얀 목련이 꾸역꾸역 졸고 있었다.
꽃 피는 것들은 꽃 피울 수 없는 것들이 가진 슬픔을 알까. 꽃 피지 못하는 것들은 꽃 핀 것들의 지겨움을 짐작이나 할까.
시간에도 무게라는 게 있다. 그때 내 사춘기의 시간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하얀 목련 속에서 시계의 초침이 아주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피어나는 것들은 제 몸에 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시계에 지배당하는 일생을 보낸다. 저 무게 없는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나를 억누르리라는 예감이 스쳐갔다.
스무 살. 본문보다 해설과 지문이 더 많은 삶이 차츰 지겨워졌다. 따분한 줄거리,그렇고 그런 구태의연한 삶의 내용들. 무기력, 무중력. 그 통증 없는 것들과 건들거리며, 노닥거리며, 속닥거리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이 삶의 진실이라면 누가 그 삶의 중심에 끼어들어 기꺼이 난장을 벌이겠는가.
내 스무 살은 어두웠다. 그믐 밤 같은 마음의 골짜기로 초승달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의심하지마, 삶이란 의심해선 안되는 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생을 점점 깊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은 사람을 자꾸 목마르게 한다. 그 목마름을 채우러 들어간 선술집에서 나는 흘러간 옛 노래 한 곡을 얻어들었다. 봄날은 간다. 제목으로만 보면 무슨 행진곡 같은 이 노래는 부르는 사람을 어느샌가 알싸한 슬픔의 오솔길로 이끌어 가곤 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 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무릇 모든 사랑은 부화뇌동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지면 같이 우는 맹목성. 그리고 그 모든 맹세의 결말은 허술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노래 속 주인공은 자신들의 맹세는 알뜰했다고 강변한다. 부화뇌동은 정상적인 판단력마저 흐려놓는 것이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시간이 가진 권능은 감정의 이면에 숨겨진 거짓을 샅샅이 벗겨버린다. 환멸에 익숙해져버린 여자는 더 이상 '옷 고름 씹어가며' 수줍은 자태로 성황당 고개를 넘나들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라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그 지고지순한 동고동락의 시간마저 '실없는 기약'이라 용도 폐기해 버린다.
그러므로 물에 떠서 흘러가는 건 새파란 풀잎이 아니라 옛 사랑의 금과옥조가 새겨진 사랑의 대장경이다. 여자는 (옛날의) 꽃편지를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다.
실없는 것은 사내들의 우둔함이지 기약이 아니다. 세상의 사내들은 자신의 마음이 아롱다롱 담겨져 있는 꽃편지가 마지막엔 그렇게 용도폐기 처분되고만다는 걸 미처 짐작이나 할까.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열 아홉 시절은 황혼이 아니더라도 슬프고 황혼이면 더욱 슬프다. 사랑이란 감정의 동시성을 맛보게 해준다. 여자는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며 오로지 순정 하나에 몸을 맡기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 여자에게 진정 얄궂은 것은 노래가 아니다. 철없이 남자에게 부화뇌동 했던 자신의 모습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사람들은 왜 <봄날은 간다>라는 이 노래를 좋아하는가. 아마도 이 노래 속엔 그리움을 자극하는 장치가 숨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황당, 청노새, 역마차 등을 그리움의 매개로 삼아 "휘날리더라" "흘러가더라" " 슬퍼지더라" 따위의 회상형 종결 어미들이 사람들의 잠자던 추억을 환기시킨다. 노래를 듣는 사람을, 부르는 사람을 어느 결에 인생의 꽃 시절에 해당하는 열 아홉살의 시점으로 돌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