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아름다운 건 사람도 꽃처럼 피고 지기 때문일 거야"

노래 '봄날은 간다' 에 맞춰쓰는 자전적 에세이

등록 2005.04.07 13:27수정 2005.04.0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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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엔 이렇게 좋은 봄날엔 삐비를 뽑으러 논둑이며 무덤가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한 주먹 가득 뽑은 삐비를 입 안에다 털어 넣고 오물거렸다. 삐비에다 찐득찐득한 송진을 함께 개어서 질겅질겅 씹으면 그게 바로 껌이었다.

삐비꽃이 쇠어 버리고 나면 이번엔 보리 이삭이 팼다. 보리밭 이랑을 지나갔다. 손에 잡히는 대로 보릿대궁 하나를 꺾는다. 대궁에 달라붙어 너덜거리는 이파리들을 떼어내고 보리피리를 만든다.


“뻬에_뻬에_”

보리피리에서는 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다. 배가 고파서 소리쳐 울 힘마저 남아있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처럼 혀 짧은소리를 내는 보리피리. 내 어린 시절의 봄날은 그렇게 "뻬에 뻬에" 배고픈 소리를 내며 흘러가 버렸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삶이란 누덕누덕 기워 입어야 하는 넝마와 같은 거라는 걸 알았다. 도서관 한구석에 걸터앉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베르테르의 이루지 못할 비극적인 사랑의 슬픔이 내 혈관에 오래도록 잔류했고 그 때문에 내 젊은 동맥은 늘상 노곤해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목련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목련안병기
교실 창밖에선 하얀 목련이 꾸역꾸역 졸고 있었다.

꽃 피는 것들은 꽃 피울 수 없는 것들이 가진 슬픔을 알까. 꽃 피지 못하는 것들은 꽃 핀 것들의 지겨움을 짐작이나 할까.


시간에도 무게라는 게 있다. 그때 내 사춘기의 시간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하얀 목련 속에서 시계의 초침이 아주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피어나는 것들은 제 몸에 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시계에 지배당하는 일생을 보낸다. 저 무게 없는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나를 억누르리라는 예감이 스쳐갔다.


스무 살. 본문보다 해설과 지문이 더 많은 삶이 차츰 지겨워졌다. 따분한 줄거리,그렇고 그런 구태의연한 삶의 내용들. 무기력, 무중력. 그 통증 없는 것들과 건들거리며, 노닥거리며, 속닥거리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이 삶의 진실이라면 누가 그 삶의 중심에 끼어들어 기꺼이 난장을 벌이겠는가.

내 스무 살은 어두웠다. 그믐 밤 같은 마음의 골짜기로 초승달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의심하지마, 삶이란 의심해선 안되는 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생을 점점 깊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은 사람을 자꾸 목마르게 한다. 그 목마름을 채우러 들어간 선술집에서 나는 흘러간 옛 노래 한 곡을 얻어들었다. 봄날은 간다. 제목으로만 보면 무슨 행진곡 같은 이 노래는 부르는 사람을 어느샌가 알싸한 슬픔의 오솔길로 이끌어 가곤 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 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무릇 모든 사랑은 부화뇌동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지면 같이 우는 맹목성. 그리고 그 모든 맹세의 결말은 허술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노래 속 주인공은 자신들의 맹세는 알뜰했다고 강변한다. 부화뇌동은 정상적인 판단력마저 흐려놓는 것이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시간이 가진 권능은 감정의 이면에 숨겨진 거짓을 샅샅이 벗겨버린다. 환멸에 익숙해져버린 여자는 더 이상 '옷 고름 씹어가며' 수줍은 자태로 성황당 고개를 넘나들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라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그 지고지순한 동고동락의 시간마저 '실없는 기약'이라 용도 폐기해 버린다.

그러므로 물에 떠서 흘러가는 건 새파란 풀잎이 아니라 옛 사랑의 금과옥조가 새겨진 사랑의 대장경이다. 여자는 (옛날의) 꽃편지를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다.

실없는 것은 사내들의 우둔함이지 기약이 아니다. 세상의 사내들은 자신의 마음이 아롱다롱 담겨져 있는 꽃편지가 마지막엔 그렇게 용도폐기 처분되고만다는 걸 미처 짐작이나 할까.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열 아홉 시절은 황혼이 아니더라도 슬프고 황혼이면 더욱 슬프다. 사랑이란 감정의 동시성을 맛보게 해준다. 여자는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며 오로지 순정 하나에 몸을 맡기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 여자에게 진정 얄궂은 것은 노래가 아니다. 철없이 남자에게 부화뇌동 했던 자신의 모습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사람들은 왜 <봄날은 간다>라는 이 노래를 좋아하는가. 아마도 이 노래 속엔 그리움을 자극하는 장치가 숨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황당, 청노새, 역마차 등을 그리움의 매개로 삼아 "휘날리더라" "흘러가더라" " 슬퍼지더라" 따위의 회상형 종결 어미들이 사람들의 잠자던 추억을 환기시킨다. 노래를 듣는 사람을, 부르는 사람을 어느 결에 인생의 꽃 시절에 해당하는 열 아홉살의 시점으로 돌아가게 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싸이더스

......의심하지마,널 사랑했던 건 진심이었으니깐....

난 여자의 눈빛을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여자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남자에게 어색한 악수를 청하고 여자는 돌아섰다. 그리고 몇 발짝 걸어가다가 뒤돌아 본다. 자신이 가졌던 가면을 버리고 떠나기가 차마 미안했을까.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끝난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단지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뿐이야. 이제 여자의 감정을 둘러싼 당의정들은 적나라하게 벗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환멸이란 이름의, 쉽게 지지 않는 꽃들이 수북하게 피어날 것이다.

봄날이 간다. 올해도 그렇게 건들거리며 지나간다. 예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연분홍 치마 대신 태극기 휘날리며 간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난 봄날이란 사계의 어느 순간이 아니라, 우리네 생의 좋았던 지점을 가리키는 지극한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봄날이 흘러가는 것이 슬픈 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멈추지 않고 흘러 간다는 덧없음이, 흘러가고 흘러온다 것, 그 자체가 슬픔인 것이다.

아, 심심하다. 노래 한 곡 때릴까. 청승맞은 한영애가 좋을까, 애잔하게 파고드는 김윤아가 좋을까. 보나마나 내 컴퓨터는 구닥다리를 싫어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중략)
김윤아 '봄날은 간다' 노랫말 일부


노랫말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건 피고 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육신이 피고 지고, 기억 속에서도 피고 지고. 그러나 나무가 어디 저버린 꽃잎을 슬픔에 겨워 내려다 보는 것을 보았는가. 노래야 흘러가라지. 난 이제 이미 저버린 시절을 돌아보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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