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57회

등록 2005.04.08 07:45수정 2005.04.0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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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마 신검장주가 동생인 풍철한을 뒤쫓는 자들이 누군가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을 이용한 것도 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는 자들을 재차 확인하기 위한 방도였을 것이다. 이미 모든 일은 틀려 버렸다.

"닫게."


섭장천은 몸을 돌려 탁자로 다가가 허물어지듯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균달의 죽음과 함께 흑요의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차라리 병기를 들고 마주쳤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풍철영이 자신의 목을 죄어 오고 있음을 느꼈다.

비류와 암와 역시 분명 위험했다. 그들을 운향소축에서 내보내는 순간 그들은 죽을지 몰랐다. 자신을 포함한 정운학과 지광계 부부 역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을지 몰랐다.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단지 몸을 피하는 것으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풍철영의 생각을 알아야 했다.

"노야…! 이제는…."

정운학의 말에 섭장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역시 결단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미 풍철한과 가군영의 상태를 보았을 것이고 구파일방을 정점으로 무림은 움직일 것이다. 어차피 계획에 들어 있는 일이었지만 시기적으로 빠른 것뿐이었다. 적절한 그리고 완벽한 시기란 본래 존재할 수 없을테지만 도모하는 일의 성패를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변수였다.

"풍장주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지? 찾아보게. 그리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이곳의 일이 지체되고 있음을 운령 그 아이가 알았다면 차선책을 생각해 놓았을거야. 일단 그 아이와 연락해 보도록 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겨우 풍철영의 아들로 위협하겠다는 생각인가? 정운학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 아닌가 의아스러웠다.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할 섭장천이 아니었다. 하지만 섭장천은 재차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자네가 직접 움직이게."


섭장천의 말에 정운학은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정운학은 자신의 사형제 들이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섭장천은 믿고 있지만 아무리 똑똑한 사매라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모를 것이다. 흑요로 인하여 끊겨진 이틀이 너무나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이제는 그가 움직여야 할 때였고, 그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다.

그는 무공만으로 사형들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무공 말고 또 다른 하나를 더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잡기(雜技)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사형제 중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 중의 하나로 만들어 주었고, 이제는 아무도 그를 비웃지 않는다. 그는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되뇌었다. 흑요는 그가 가장 아끼던 수하 이상의 존재였다.

"노야께서 한번만 도움을 주셔야 겠습니다."

섭장천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하는 그의 얼굴엔 알지 못할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
나충일(羅忠壹)은 계집 둘과 뒹굴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심복이 전해 준 보고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칠년 전 부러졌던 다리뼈에 비 오는 날 그러 듯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하체에 달라붙어 있는 계집과 허여멀건한 엉덩이를 하늘높이 쳐들고 있는 계집 둘을 발로 동시에 차버렸다.

"아앗---어맛---"

계집들의 비명도 교성도 아닌 소리를 들으며 그는 황급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일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할 치욕을 안겨 준 그 년놈들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한다.

(황원외… 이 놈! 네 놈이 반드시 조국명을 찾을 줄 알았지.)

그는 어느 정도 걸치고는 방을 나섰다. 일단은 그의 부친을 만나야 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갖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그의 움직임은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을 만한 위치였으므로 굳이 부친 몰래 움직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장자인 자신을 제쳐두고 동생으로 하여금 가업(家業)을 이어가게 결정한 부친이라도 눈 밖에 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점차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들었던 저 소리가 싫었다. 하지만 저 소리로 인해 조그만 대장간지기였던 그의 부친은 오십년만에 산서상인연합회의 오대수장(五大首長) 중 한 명이 되었다. 양만화의 죽음으로 비게 된 군수업의 수장 자리는 바로 그의 부친 몫이었다. 산서(山西) 분양현(汾陽縣)에서 시작한 천병정(千兵鼎)은 여인들의 바늘부터 노리개는 물론 농기구에서 각종 병기까지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물건이 없었다.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마비시킬 즈음 그는 돌로 엉성하게 지어 놓은 곳으로 들어갔다. 어림잡아 백여명이 되는 인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내는 소리는 바로 옆 사람의 목소리마저 듣기 어렵게 했다.

역시나 그의 부친은 두꺼운 마의를 입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육십이 넘도록 평생 저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몇 대에 걸쳐 놀고먹을만한 돈을 모았고 열흘 전 오대수장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통보를 받았지만 여전히 그는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뿌리듯 돈을 썼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돈을 써대는 아들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종관(羅宗冠)은 자신의 아들이 다가오자 구부정한 등을 펴고는 귀퉁이에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놓은 움막으로 들어갔다. 번듯한 방이라도 만들어 두면 좋을텐데 그는 처음 대장간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움막을 지어놓았다. 가끔 쉬고 싶을 때 그는 이 움막을 사용했고. 그 시간도 반시진이 채 되지 않았다.

'편하게 만들면 더 쉬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충일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평생 쇠를 때려왔으면 쉬고 싶어지련만 그의 부친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부친을 따라 움막에 들어서자 나무로 만든 때 묻은 침상에 걸터앉은 부친이 대뜸 물었다.

"진성에 가려고?"

하여간 기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지만 천병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귀신처럼 알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수하들이 부친에게 미리 보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잡아 와 돼지우리에 처넣어야지요."

퉁명스러운 나충일의 말에 나종관은 의외로 고개를 끄떡였다.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나충일이 하는 일이라면 일단 혀부터 차는 것이 순서였고, 그 다음은 욕설이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적당한 선에서 허용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듯 처음부터 허락한 적이 없었다.

"네가 그동안 철저히 준비했다지만 아비로서는 안심이 안 되니 중의(仲宜)와 선화(嬋花)를 딸려 보내마. 행동을 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중의와 상의해라."

"아버지…!"

중의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선화는 어머니의 수족인 사람이다. 나충일로서는 껄끄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직 부모의 말만 듣는 사람들이었다. 나충일이 어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내준다는 것은 그의 뜻을 존중해 주기는 하되 그를 믿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신검산장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 애비가 해줄 말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면 네가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회는 언제든 있다. 너는 내 자식이고 나는 네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같다. 언제나 사고를 저지르고 말썽만 피우는 자식이라 다를까? 나충일은 아버지의 태도에서 뜻밖이라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와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에 대해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쓸 줄 모르는 아버지가 미웠었고, 결국 대장장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오직 한 길을 걸어 온 아버지가 산서상인연합회의 오대수장 중 하나가 된 최근에서야 은근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업신여기던 대장장이가 이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화북 상계를 흔들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며칠 사이에 많이 달라지신 것 같군요."

지위와 명예가 사람을 그렇게 보이게 하는 걸까? 한없이 초라하게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녀석. 이 애비는 달라진 게 없다. 네 생각이 바뀐 것이겠지."

나충일은 잠시 아버지의 굳은살이 박힌 손을 바라보다가 움막을 빠져 나갔다. 나종관은 고개를 저었다. 망가진 자식을 보는 그의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망가진 자식 놈이 한 일 중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제39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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