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품 챙기고 나올 겨를조차 없었다"

[르포] 양양군 산불 피해 지역에서 만난 김사덕·양순봉 부부

등록 2005.04.08 13:19수정 2005.04.0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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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차창 밖으로 비치는 역광에 숲은 여느 봄날의 그것처럼 실루엣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점차 다가설수록 나무의 윤곽만 그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는 불에 탄 숯덩이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독한 화상을 입은 산야는 쓰린 상처를 안고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불에 타 쓰러진 인근 마을 야산의 소나무들
불에 타 쓰러진 인근 마을 야산의 소나무들김범태
4일 밤부터 30여 시간 동안 250여ha의 산림을 태우고 꺼진 강원도 산불로 온 국민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7일 이번 산불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 중 한 곳인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사천리를 찾았다.

인근 마을인 강현면 물갑리에 다다르자 군데 군데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흉측한 상처가 산등성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이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타 버린 숲과 민가의 모습은 계속 반복됐다.

마을에 도착하자 아직도 매캐한 그을음 냄새가 코끝에 스쳐왔다. 노인회관 마당에는 이곳 저곳에서 보내온 생필품이 담긴 구호세트가 쌓여 있었다. 몇몇 자원봉사자들이 쌀 포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르며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완전히 불에 탄 김사덕씨 부부의 농가
완전히 불에 탄 김사덕씨 부부의 농가김범태
이 마을에 사는 김사덕(70)씨와 양순봉(64)씨 부부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고 있었다. 양씨의 눈가에서는 인사를 나누기도 전부터 눈물이 흘렀다. "기가 막힐 뿐"이라며 혀를 차던 그녀는 "어떻게 마련한 집인데…"라며 연신 손수건에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안내로 집 안에 들어서자 모든 가재도구가 숯덩이로 바뀌어 있었다. 천정까지 삼켜 버린 화마는 그간 두 노인이 알토란같이 모아두었던 소중한 재산과 추억을 순식간에 전소시켰다. 타다만 벽시계만이 그저 아무 일도 모르는 듯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양순봉씨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다
양순봉씨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다김범태
김씨의 집까지 불이 번진 건 5일 오전 6시경. 새벽 1시가 넘어서면서 인근 사교리까지 산불이 번졌다며 주민대피 경보방송이 울렸고, 강풍에 힘을 실은 불길은 곧 금풍리 일대를 거쳐 이 마을까지 덮쳤다고 한다.


불은 김씨 부부가 지난해 수확한 벼를 쌓아두었던 창고에 옮겨 붙으며 삽시간에 20여평의 가옥과 10평이 넘는 창고를 모두 태웠다. 이 때문에 80가마니가 넘던 찰벼를 비롯한 사료와 씨앗, 집 안에 있던 가재도구는 물론 현금과 패물 등이 모두 소실됐다.

이미 자욱해진 연기 때문에 시야 확보도 어려운 상황에서 경황이 없던 두 노인은 "온 몸이 화끈거리는데 귀중품을 챙길 겨를이 어디 있었겠느냐"면서 "뭘 가지고 나와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신이 없어 몸뚱이만 겨우 빠져나왔다"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화재의 흔적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화재의 흔적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김범태
"눈물이 나서 도저히 방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흔드는 양씨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발길을 옮긴 뒤꼍 마당에는 가스통과 깨진 장독이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다. 검게 타버린 가재도구 사이로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김씨 부부처럼 피해를 입은 가구가 이 곳 사천리에만 14가구에 이른다. 피해 주민들은 현재 친척집이나 노인회관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후속 대책을 기다리고 있다.

김사덕씨 부부는 이번 화재로 그간 가족처럼 키워오던 황소를 잃어버렸다. 불이 동구 밖까지 옮겨 붙자 놀란 황소의 고삐를 붙잡고 황급히 피신시키려 했으나 웬일인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더라는 것. 세간은 뒤로 하더라도 생명을 가진 짐승이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에서 멍에를 당겼지만 황소는 김씨의 손길을 뿌리치고 불길 속으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황소의 요동에 하마터면 김씨마저 큰 화를 입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이들 부부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황소의 생사마저 알 수가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얼마 전 태어난 송아지와 어미소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가재도구가 화재 현장에서 나뒹굴고 있다.
가재도구가 화재 현장에서 나뒹굴고 있다.김범태
변변한 가재도구 하나 가지고 나오지 못한 이들 부부는 어렵사리 구한 휴대용 가스버너에 라면을 끓여먹으며 근근이 끼니를 때우고 있다. 베란다에 임시로 비닐을 치고 만든 잠자리는 새벽녘이면 찬바람이 몸속까지 파고 든다.

전날 동해에 사는 막내아들이 달려와 잿더미로 변한 노부모의 집을 정리했지만 이들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실정"이라며 답답해 했다. 양씨는 "그나마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이웃들이 급하게 사다 줘 입고 있다"면서 "지금 당장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특히 김씨는 화재 당시 들이마신 연기 때문에 얼굴이 붓고 목에 가스가 차 호흡곤란을 느끼는 등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일단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이다.

서울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 손을 내밀며 위로의 인사를 건네자 양씨는 "그래도 이렇게 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극복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엿보였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소매를 걷어붙이며 다시 일어서겠다는 재기의 의지를 다잡는 촌로의 등 뒤로 잔인하도록 눈부신 봄 햇살이 부서지듯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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