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빨래', 그 질척한 삶의 이야기

골목골목 뮤지컬 <빨래>를 보고

등록 2005.04.18 15:37수정 2005.04.1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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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 산동네에는 골목골목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토끼굴처럼 조그만 8평 짜리 반지하방 그리고 옥탑방에는, 가난한 가족이, 상경한 학생이, 직장인이, 외국인 노동자가, 자식들 떠나가고 버려진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산다.

최저임금을 받아서 방세 내고 생활비 하면 아무것도 없는 생활. 이렇게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골목골목 뮤지컬 <빨래>가 여기 있다.


명랑씨어터 수박
서울의 가난한 동네. 주인공 나영이 이사를 온다. 서울살이 5년. 늘어난 건 세간, 사라진 건 꿈. 보고싶은 건 엄마다. 좁은 골목길과 하늘과 가까운 옥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주인공 나영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나영은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을 받고 서점에서 일한다. 서점 주인인 '빵'은 허구헌날 자신이 젊었을 적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고생했던 이야기를 늘어놓고, 여직원들을 찝쩍댄다. 시간 외 급여, 월차, 연차, 생리휴가? 이딴 건 다 딴 나라 이야기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의 방. 이 집에는 혼자 사는 희정 엄마, 장애인 딸과 살며 박스를 모으는 주인 할매가 살고 있고, 옆집에는 몽고에서 온 솔롱고와 필리핀에서 온 그의 친구가 살고 있다. 나영은 시간이 나면 빨래를 한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명랑씨어터 수박
빨래를 널러 옥상으로 올라간 나영을 본 솔롱고는 나영에게 반한다. 삶이 힘든 건 솔롱고도 마찬가지다.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연수 기간이 다 끝나가는데 3개월치 월급을 못 받았다. 그가 서울에서 배운 말은 '빨리 빨리' '열심히 일해' '때리지 마세요'다. 나영이 이런 곳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말에 솔롱고는 '그래도 하늘이 가깝잖아요. 몽고에서는 돈 벌기 힘들어요'라며 낙천적으로 웃는다.


회사 경영을 해야 할 돈으로 사채시장에 뛰어든 사장 '빵'에게 충고를 하다 잘리게 된 회사 언니를 거들다 창고 정리라는 한직을 맡게 된 나영. 창고정리를 못하겠다고 하자 그럼 그만두라는 말을 듣는다.

술에 취해 집에 오다 솔롱고를 만나고, 둘이 함께 집에 돌아가다 솔롱고네 집주인을 만난다. 주인은 나영에게 너는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고 나영이 자신은 외국인이 아니라고 하자, 한국 남자 놔두고 왜 이런 녀석을 만나냐며, 솔롱고를 비하한다.


술취한 나영이 대들자 옆집 주인은 나영을 때리려고 하고 이를 막던 솔롱고가 나영을 보호하자, 솔롱고를 폭행한다. 경찰서에 가면 강제출국될 수밖에 없는 솔롱고는 억울해도 맞고만 있고, 주인은 '솔롱고'에게 "당장 방 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명랑씨어터 수박
할매가 아들의 사업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집을 팔게 되자 희정 엄마는 장사를 하는 동대문에서 가까운 곳으로 방을 얻어 나가고, 나영은 솔롱고와 합쳐서 살게 된다. 할매는 이사 가는 이들에게 이별선물로 세제를 하나씩 안기고….

작은 것에서도 행복해 하는 그들을 보며 깔깔 거리고 웃다가도 문득 가슴 한 구석에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작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보다 힘 없는 사람에게는 마구잡이로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

직원에게 서슴없이 반말하고, 호봉이 높아 월급을 많이 줘야 한다는 이유로 직원을 자르고, 여직원들은 치근덕거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라면 무시해도 되고, 그들의 월급은 늦게 줘도, 떼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좀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약점을 잡아 이용하는 사람들.

계속 당하면서도 '이번 달 방세는 어떡하나'는 생각에 부당한 대우를 견디고 사는, 그러면서도 서로 돕고 아끼며 사는 이들의 웃음이 눈물겨운 뮤지컬이 바로 <빨래>다.

<오! 발칙한 앨리스>에서 열연했던 김영옥을 비롯해 김현정, 오미영, 민준호, 김승언, 고승수 장세훈 등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배우들이 서울의 한 가난한 동네와 시내의 서점을 채우고 반지하방과 옥상을 오르내리며, 역동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무대 만들기를 보여주는 뮤지컬 <빨래>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역과 노래. 위트 있는 가사와 건반, 드럼, 기타, 베이스 등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생생한 라이브 연주가 돋보인다.

덧붙이는 글 |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4/14∼5/1

덧붙이는 글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4/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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