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동기들이 야구팀을 만들었습니다. 팀 이름이 ‘SKK사발스’랍니다. 답답한 일상에서 탈출을 시도하며 세상을 향해 즐거운 ‘사발(허풍)’이라도 떨어보자는 거지요. 마치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듯 정형화된 자세를 취해봤습니다.김봉수
82년 프로야구 출범, <삼미 슈퍼스타즈>와 장명부를 함께 추억하는 친구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한창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조그만 공터를 찾아다니며 야구를 즐기던 때였다. 대학 동기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 사이에 프로야구 출범을 접하며 야구와 함께 초등학교를 보냈다.
우리 나이치고 왕년에 야구방망이 한 번 휘둘러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동기들이 대학 입학 후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야구를 하자며 모교 운동장에 모였다.
모두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몸을 풀었다. 한 명이 공을 쳐주면 각자 맡은 수비 위치에서 공을 받아내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예전만 못했다. 공을 띄워주면 놓치는 게 정상이었고, 땅볼로 주면 알까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10여년만에 껴 본 글러브와 손에 쥔 방망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 어…’하며 연신 실수를 해대는 동기들의 모습은 즐거웠다. 그저 야구를 핑계로 생사확인이나 하자는 것이었지, 멋진 타격과 환상적인 수비를 보이려고 모였을까? 웃음이 나오는 것은 차라리 행복했다.
그렇게 2시간 정도를 뛴 후,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초반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장명부’에 대한 추억으로 맞춰졌다. 공교롭게도 이날 일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동기들이 삼미슈퍼스타즈의 장명부를 모를 리 없다. 프로야구의 전무후무한 기록인 30승 투수였다는 점과 연일 패하던 삼미팀도 장명부가 등판하는 날은 이겼다는 점 때문이다.
“장명부가 그 당시 1년에 470이닝 이상 던졌던 걸로 기억한다. 프로의 세계에서 ‘돈’을 벌기 위한 몸부림이었지. 30승 이상을 올리면 1억인가가 보너스로 지급되는 옵션계약이었는데 마구잡이로 등판해서 결국 그 조건을 채운 거야. 장명부는 최다 등판과 최고 완투 등의 기록도 갖고 있을 거야.”
한 동기가 장명부에 대한 분석을 내 놓았다. 난 머리 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470이닝이면 한 경기가 9이닝이니까, 9로만 나눠도 50경기가 넘는다. 계산이 경기 수에 이르자 자연스레 혀가 내둘려졌다. 지금 투수들이 대략 200이닝 전후에서 한 시즌을 마감하니까 장명부의 기록은 정말이지 돈에 몸을 판 셈이다. 남들 2년치를 1년에 다 쏟아 부었으니 말이다.
“다 쓸어버리겠다, SKK사발스”, 아이들 추억이 자연 속에서 빛을 바라길...
“나는 MBC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다. 프로야구 출범하며 야구단마다 어린이회원 모집한다고 했을 때, 내가 강릉MBC에서 줄 서서 회원 가입했던 게 기억난다. 야, 그 때 5천원인가 회비 내면 야구 모자하고 점퍼, 가방 등 많이 줬잖아.”
강릉에서 학교를 다닌 동기가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동기가 끼어든다.
“그때 우리 동네엔 텔레비전이 두 집에만 있었다. 너희들은 야구 중계도 보고, 회원가입도 하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텔레비전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학교 앞에서 프로야구 선수 사진 걸어놓고 팔고 했잖아? 겨우 그걸로 선수들 얼굴이나 익힐 정도였거든.”
태백산맥으로 유명한 벌교에서 학교를 다닌 동기의 말이다. ‘이럴 수가…’ 같은 세대를 살았다고 프로야구에 대한 추억이 같은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말을 이었다.
“야, 그때 서울도 비슷했지 뭐. 지금 강남역 있잖아? 그 당시에는 뉴욕제과 빼면 건물은 거의 없었어. 뉴욕제과 뒤편에 있는 큰 공터에서 야구를 했었거든. 그동안 강남도 무척 변한 거지.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텔레비전 두 대는 너무한 걸.”
우린 한동안 프로야구 초창기를 훑어 내렸다. OB베어스 모자의 흰바탕에 파란색으로 쓴 OB 글자는 OB맥주 브랜드를 그대로 옮겨 논 것이다, 해태타이거즈의 빨간색과 검정색이 조화를 이룬 유니폼이 촌스러워도 멋졌다, 박철순의 22연승은 정말이지 신화다, 그때는 고교야구도 엄청난 인기였다 등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가며 추억을 공유하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