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제 미술솜씨 빼다 박았습니다

업그레이드 되지 못한 것

등록 2005.04.20 00:16수정 2005.04.2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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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소싯적 이야기 할 때 줄반장 한 번 안 해본 사람 없고,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고 확인하려 하지도 않는 초등학교 시절까지 공부 못했다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물론, 저도 공부도 잘하고 반장도 해봤습니다. 뭐 믿거나 말거나 이긴 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고백하자면 그 많은 학과목들을 모두 다 잘했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해야겠군요. 못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하면 앞서 말한 것들도 전부 거짓말인 것을 눈치 챌 것 같아서요.

하여간 그 중에서 특별히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술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를 무진장 괴롭힌 과목입니다.

사람을 그리라면 로봇을 그리고, 고양이를 그리라면 호랑이를 그리고, 심지어는 집을 그리라면 집은 안보이고 정사각형 안에 또 다른 사각형 두개를 창문이랍시고 크게 그려 놓고는 땡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너는 그냥 사실화 말고 추상화로 한번 도전해보는 것이 어떠냐?”라고 말할 정도였죠.

하여간 미술은 못해도 고등학교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도 그냥 저냥 들어 갔습니다. 그림 그릴 일이 없으니 살만 하더군요. 그런 측면에서 대학은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해방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제게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때는 제 엄마 닮았다가 커가면서 외삼촌을 닮더니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되니까 저를 닮기 시작합니다. 저도 그만한 때 얼마나 뛰어 다니고 나돌아 다니고 그랬는지 그 때 큰 형님이 지어주신 별명이 ‘빨빨이’였습니다. 빨빨거리며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를 닮기 시작한 아들놈도 예외일 순 없죠. 잘 돌아 다닙니다. 직선거리 2M 이상은 무조건 뜁니다. 어디 놀러 가면 사정거리 안에 붙잡아 놓느라 정신없습니다. 뭐 키 작은 것도 그렇고 말하는 폼 새도 그렇고 가능하면 좀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까지 쏙 빼 닮으려 합니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겠죠?


오늘 퇴근해 들어와 보니 아내와 함께 오늘 학교에서 했던 수업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옷 갈아입고 손 씻고 나왔더니 아내가 저를 부릅니다.

“여보!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뭔데….”
“크흐흐흐. 선웅이가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야.”
“근데 왜 웃어?”
“그냥 당신 생각이 나서.”
“…….”

조그만 카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수업이었나 봅니다. 일단 구경 한 번 하시죠.

a 2005년 4월 19일 고릴라

2005년 4월 19일 고릴라 ⓒ 김지영

a 2005년 4월 19일 사자

2005년 4월 19일 사자 ⓒ 김지영


고릴라와 사자랍니다. 그렇게 동물원을 데리고 다녔건만 음….

a 2005년 4월 19일 사과

2005년 4월 19일 사과 ⓒ 김지영

a 2005년 4월 19일 야구방망이

2005년 4월 19일 야구방망이 ⓒ 김지영


눈썰미 좋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과와 야구 방망이랍니다. 흐이구….

아들놈 자존심 상할까봐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이 미어 터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철석같이 믿어왔는데 이왕 진화를 시켜주실 거면 좀 업그레이드를 왕창시켜 주시지. 그림 그리는 솜씨만큼은 어찌 그리 진화의 법칙을 철저히 무시하셨나요. 다윈 어르신.

그래도 이 그림은 좀 봐줄만합니다.

a 2005년 4월 19일 개미

2005년 4월 19일 개미 ⓒ 김지영

a 2005년 4월 19일 강아지

2005년 4월 19일 강아지 ⓒ 김지영

a 2005년 4월 19일 고양이

2005년 4월 19일 고양이 ⓒ 김지영


개미, 강아지, 고양이입니다. 이 그림들은 좀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군요.

제가 사진기를 들이대니 저도 보는 눈이 있는지 고릴라와 사자는 좀 빼주지 하는 표정이 역력 합니다. “아빠 그것은 찍지 마!” 이러더군요.

다윈의 진화론 못지않게 부전자전이란 고사 성어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만큼은 이 두 단어가 뼈에 사무칩니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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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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