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6년, 고사리계의 최강자 꿈꾸다

고사리를 꺾기 위해 산에 오르다

등록 2005.04.20 15:30수정 2005.04.21 11:0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제 막 땅 속에서 올라오는 고사리
이제 막 땅 속에서 올라오는 고사리오창경

"가물어서 아직 산에 고사리가 안 올라 왔을겨. 양지쪽에 이른 고사리는 올라왔을까? 오늘은 산에 좀 올라가 볼까?"


옆집 할머니는 나무에 물도 오르기 전부터, 산에 진달래가 피기 전부터 뒤 산을 바라보며 고사리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저도 작년에 맛보았던 쫄깃하고 향긋한 고사리 맛을 기억하고 있어 고사리가 땅속에서 머리를 들어올리고 나올 날을 고대했습니다.

날이 따뜻했던 지난 주 어느 날, 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집안일을 대충 해놓은 뒤 옆집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벌써 산에서 고사리 꺾기에 한창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한테 한 마디 귀뜸도 없이 올해 첫 고사리 찾기 원정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당장 할머니의 뒤를 쫓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시골 살이 6년. 이제 저도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을 두루 꿰게 됐습니다.

굵고 검은털이 있는 먹고사리
굵고 검은털이 있는 먹고사리오창경

철이 이르다 싶었는데 산에 오르자마자 기다란 고사리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머리에 흙을 이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린 고사리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누군가 뒤 쫓아 올 것처럼 정신없이 고사리들을 꺾었습니다.

산들바람도 살살 불어오고 잡풀들도 아직 없어서 고사리를 찾아내는 일은 너무 즐거워 콧노래까지 나올 것 같았습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없습니다. 올해 첫 고사리는 저의 차지가 된 것입니다. 어쩐지 고사리 무림의 최강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으쓱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많은 강호의 고사리 고수들이 아직까지 고사리 원정에 나서지 않은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수풀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너구리나 산토끼 같은 산 짐승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행동을 멈추고 조용한 인기척을 향해 둘러보았습니다. 그 소리의 정체는 뒷골 할머니였습니다.


우리 동네 고사리 고수들 중에 한 분인 옆집 할머니
우리 동네 고사리 고수들 중에 한 분인 옆집 할머니오창경

올해 76세이신 뒷골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걸으면서도 고사리를 찾아서 산비탈을 힘겹게 헤집고 다니신 것이었습니다.

뒷골 할머니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고사리 무림의 강자 중 한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관절염 때문에 무릎이 아파 고사리계 은퇴를 선언하셨지요. 그러면서 우리 옆집 김경희 할머니에게 굵은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전수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도 김경희 할머니를 사부로 모시고 뒤따라 다니면서 굵은 먹고사리를 많이 꺾어 친척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산에 다니시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실려구요."
"그러게, 우리 아들이 고사리 꺾다가 다치면 큰일 난다고 성화를 하는데도 몰래 나와 봤슈."

"고사리는 많이 꺾으셨어요?"
"이제 눈도 잘 안 뵈고 지팽이까장 짚고 다니는데 꺾으면 얼마나 꺾겠슈. 그냥 운동 삼아 나와 봤지. 젊었을 때는 이 산에서 고사리 꺾어다가 장에 팔아서 애들 학비도 주고 했는디…."

"이 산에 고사리가 그렇게 많아요?"
"아까 보니께 저쪽 응달에서 돌아댕기대유. 거기는 가는 고사리만 있는덴디. 조기 모퉁이를 돌아서 묵은 밭 있는 디부터 가봐야지. 거길 가야지 굵은 먹고사리들을 꺾지. 아까 식전에 숙자 엄니가 한보따리를 해가는 것이 오늘은 가봐야 틀렸슈."

내가 첫 고사리라고 좋아했던 곳은 고사리 고수들에게는 관심 밖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겨우 시골살이 6년차에, 고사리 찾기 원정 3년차인 주제에 조금 전까지 고사리 찾기 고수가 된 것처럼 우쭐했던 나는 기가 팍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땡이가 굵고 검정색이 나는 먹고사리가 나는 곳은 따로 있슈."
"거기가 어딘데요?"

저는 뒷골 할머니 곁으로 바짝 달라붙어서 할머니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조금만 걸어도 숨이 이까정 차서 고사리 찾기는 다 틀렸슈. 거기 발밑에 고사리 하나 있네유."

정말로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 보이는 뒷골 할머니였지만 젊은 날 쌓아왔던 고사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의 거동은 불편했지만 눈으로는 계속 고사리를 찾고 있더군요. 그러더니 아예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저에게 고사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뒷골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고사리를 많이 꺾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사리를 모두 내 보따리에 넣을 수 없어 할머니의 보따리에도 넣어드렸습니다.

"뭘 그런대유. 안 그래도 되는디…."

할머니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내가 꺾어주는 고사리가 싫진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뒷골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굵고 실한 먹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어 우리 동네 고사리계를 평정하리라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고사리는 말유, 너무 응달도 아니고 양지도 아닌 곳에서 많이 나지유. 그리고 그렇게 멀뚱하게 서서 찾으면 안 보이는 것이 고사리유. 앉아서 아래에서 위를 보고 찾아야 언네(어린 아이) 손처럼 오므리고 있는 고사리가 보이는거유."

비법을 전수 받을 고수를 찾아 무림을 헤매던 협객은 드디어 비범한 도인을 만나 물지게부터 지게 되었어도 머지않아 칼날을 번뜩이며 강호에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법 전수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뒷골 할머니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대로 고사리를 꺾어 드렸지만 쉽게 비책을 숨긴 곳을 가르쳐줄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고사리를 찾아 산을 헤매다가 발견한 '솜방망이'라는 들꽃 한 포기. '
고사리를 찾아 산을 헤매다가 발견한 '솜방망이'라는 들꽃 한 포기. '오창경

그래도 중간에 그만 두겠다고 하기도 어려워 그 날만큼은 마음을 비우고 은퇴한 고사리의 달인을 위해서 봉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얼라, 여태 여기서 뭘 한디야. 내가 작년에 제선 엄마랑 같이 다녔던 저 뒷고라당(뒤골짜기)으로 오라고 했잖여. 하도 안 오기에 내가 옴방진 고사리는 다 꺾어와 버렸잖여. 이 것 좀 봐. 아까 진작 나를 따라 왔으면 제선 엄마도 많이 꺾었을 텐디."

어느새 나타난 우리 옆집 김경희 할머니의 보따리에는 정말로 굵고 검은 먹고사리가 한 가득이었습니다. 정작 고수는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먼 곳을 헤매면서 헛꿈을 좇았습니다.

"낼 모래 비 오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고사리가 나올규. 그 때는 아침 일찍 와서 꺾어유."

뒷골 할머니는 이 말을 남기고 한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손에는 내가 꺾어 준 고사리 보따리를 들고 총총히 산을 내려갔습니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전원주택 라이프 5월호에도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 전원주택 라이프 5월호에도 송고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3. 3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4. 4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5. 5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