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935년 5월호에는 경복궁 근정전 내에서 벌어진 '순직경찰관소방수초혼제'의 광경을 수록하고 있다. 임금의 자리인 용상이 '왜놈 순사들'의 제단으로 변해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때마다 근정전의 용상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제단으로 개조되었음은 물론이다. 1935년부터는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순직경찰관초혼제에 곁들여 함께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개최장소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순직경찰관초혼제와 순직소방수초혼제에 합사된 순직자들의 인원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통계표를 작성할 공간은 없으나 대략 5년 정도의 간격으로 훑어보면, 그 내역은 이러했다.
우선 제1회였던 1921년에는 초혼제에 모셔진(?) 순직자가 54명이었고, 1925년에 가서는 140명으로 늘어났으며, 1930년에는 순직경찰관의 숫자는 205명에 이르고 있었다. 다시 1935년에는 순직경찰관이 259명에다가 이해부터 함께 초혼제가 이뤄진 순직소방수의 숫자가 27명이었으며, 1940년에는 순직경찰관과 순직경방직원(즉 순직소방수)가 각각 306명과 42명이었다.
그리고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마지막 사례는 1943년의 '순직경찰관경방직원초혼제'인데, 경찰관과 경방직원의 숫자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나 모두 합쳐 448명이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식민지 조선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경찰관과 소방수의 숫자가 그렇다는 것인데, 이를 평균치로 계산해보면 해마다 십수 명 정도의 '순사'들이 숨져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새삼 설명을 달 필요도 없이, 많은 경우에 그네들이 '비적(匪賊)'이라고 부르던 독립군이 그 상대였을 것이다. 해마다 죽은 '왜놈 순사'들을 극진히 모시는 초혼제를 지켜보는 숱한 조선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5월 21일자에 설의식 기자가 적은 '수원사건(水原事件)에서 김상옥사건(金相玉事件)까지, 허다참극(許多慘劇)의 와중(渦中)에 순직했다는 경관이 사십륙 명, 그 중에는 조선사람도 열 아홉'이라는 글을 옮겨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늦은 봄비가 개일 듯 말 듯한 작일 왜성대(倭城臺)에서는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최로 소위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초혼의 제물을 받는 그들 중에는 전염병(傳染病)의 예방에 종사하다가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있으며 저희들끼리 격검(擊劍)연습을 하다가 맞아 죽은 자도 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강도(强盜)나 절도(竊盜) 범인을 잡으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무수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들을 죽이다가 다시 독립단들의 들쳐오는 총칼에 맞아 죽은 자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단의 손에 죽어 버린 자는 전체 일백 한 사람 중에서 마흔 여섯 사람이나 되며 다시 그 중에서 열 아홉 사람은 조선의 아비를 모시고 조선의 아들을 거느린 조선사람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는 독립단과 또는 독립에 관한 사건으로 싸우다가 죽은 자는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 삼월 일일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 소리가 일어난 지 스물 일곱째 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피가 끓게 한 수원의 참사(水原慘事) 당시에 약한 주먹에서 날리는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하여 금년 1월 17일 새벽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육혈포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 전촌(田村)으로 끝을 마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백 한 명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 남은 혼(魂)을 불러주는 자의 정성에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구별이 없이 또는 전염병을 예방하다가 죽었든지 독립단을 죽이다가 죽었든 지의 구별이 없이 오직 사람으로의 최후의 목숨을 버린 그를 위하여 설워하는 줄을 아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람으로의 죽음'을 위하여 가석히 여기는 동시에 그 일이 명의 경관들이 죽어 넘어진 벌판에 다시 기백천 '사람'의 죽음이 깔렸음을 과연 기억할는지, 일 백 한 명의 죽음은 초혼의 제물을 받치는 자나 있거니와 궂은 비에 추추히 우는 기백천의 영혼은 부칠 곳이 어디인가?"
순직경찰관 한 사람의 죽음 너머에는 수백, 수천의 불쌍한 영혼이 있었을 거라는 지적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순직경찰관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낸 자리가 하필이면 경복궁 근정전이었으니 까딱했더라면 이곳이 조선의 야스쿠니 신사로 굳어질 뻔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를테면 수난의 역사치고는 참으로 고약하고도 수치스런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경복궁이 겪은 이러한 수난의 역사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짓만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궁궐의 의미를 되새기는 생각의 틀이나 보는 눈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이른바 '순직경찰관초혼제'의 연도별 (1921~1943) 개최일자 및 장소, 관련자료의 목차 등은 다음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http://cafe.daum.net/distorted)'에 따로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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