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대동세상이라? 내 생각도 그 사이 좀 변했다고나 할까. 그간 내 관념 속의 미륵세상이나 대동세상이라는 의미는 막연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표현이야 어찌 되었든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조금 더 살기 나은 세상임은 변함이 없겠네. 적어도 이 마을은 말일세. 내 평생의 꿈은 이곳에 내가 원하던 마을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 해야 할 듯하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끝이라 형언한 까닭은 이런 점에 있지. 그러나 이 마을을 토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불공평한 억압과 착취의 고리가 번성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게 내 나머지 꿈이네.”
권병무가 대답했다. 예전의 확고한 모습에서 조금 물러난 듯한 어조였으나 표정에서는 더 큰 확신이 읽혀졌다.
“때문에 저희를 부른 것이옵니까?”
이번엔 오경석이 물었다.
“그래. 내가 할 몫은 여기까지인 듯하네. 나도 많이 늙었고…, 이후의 일은 자네들의 몫일세.”
“하오나 저희들은…,”
오경석이 말꼬리를 잡고는 머뭇거렸다.
“알아. 자네들이 진보적이긴 하나 역성혁명이나 모반까지 모의할 사람들이 아님은 내 익히 아네.”
“하시면 왜?”
역시 오경석이 물었다. 유홍기는 입을 꾹 다물고 권병무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여기 일은 여기 젊은이들이 알아서 할 것일세. 그것이 이 마을 안에서의 일이든 밖에서의 일이든, 모반이 됐든 체제 내 변화가 됐든 말이지. 이전에도 이후로도 자네들은 여기 사람들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일세. 다만 자네들이 판단하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다 생각되면 그 때 나서주면 되네.”
“거사가 성공하면 그때 나서란 말씀입니까?”
유홍기가 말했다.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겠네. 그저 지금처럼 개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제자들을 육성하는데 힘써 주면 될 것이야. 때가 되면 많은 인재들이 필요할 것인데, 그때의 인재란 수구의 묵은 때가 묻지 않은 참신한 인재들이어야 할 것인즉.”
“그런 말씀이라면 굳이 저흴 이곳까지 부르지 않았을 터인데요?”
유홍기가 본론이 궁금하다는 듯 재우쳐 물었다.
“그래, 내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 이번에 한양에 올라가거든 쟁쟁한 사대부가 권문반열의 자제들을 물색하여 보게. 내 듣기로는 북촌 자제들 중에 김옥균이나 서광범, 박영교, 박영효 형제가 영민하다 하는데 그런 아이들이라면 좋겠지.”
“영민하기로야 김윤식이나 유길준 같은 아이도 빠지지 않지요. 총명한 사대부 자제가 어디 이들뿐이겠습니까. 허나 저희 같은 중인 신분이 북촌 양반댁 자제를 지도한다는 게 당키나 하겠는지요?”
입담이 걸은 유홍기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래 맞는 이야기네. 그것이 나 또한 권문세가의 자제들을 제자로 두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 자네들에게 이르는 것이야.”
“저희가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오경석이 신중하게 물어왔다.
“박규수, 그 분의 도움을 받도록 하게.”
“평안도 관찰사이신 환재 영감을 이르는 말이옵니까?”
오경석이 물었다.
“그래. 자네들과 나이 차이를 넘어서 친우와도 같이 지내는 사이가 아닌가? 내년 2월이면 이곳 평안도 관찰사에 부임한지도 2년을 채우게 되니 그 후엔 필연 내직에 봉해지실 게야. 후진양성의 일을 그때부터 시작해도 좋겠지만 그전에 전언을 통해서라도 자네들이 물색 후 규합해 두면 좋겠지”
“그러잖아도 힘 있는 가문의 자제들을 대감의 문하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을 아니 드린 것은 아니오나 환재 대감께서 주시는 가르침이 어르신의 의향과 꼭 같기야 하겠습니까? 외려 어르신이 겨냥한 인재를 환재 대감께 넘기는 결과를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유홍기가 끼어들었다.
“내 비록 그 어른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나 그 분이 북학파의 학맥을 이으신 분이고, 비록 조 대비의 보살핌이 있었다 하나 지금까지의 치정 이력이면 능히 뜻을 합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네.”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오니까? 어르신.”
유홍기가 물었다.
“하나 더. 돌아가는 길에 조만간 우리 기범이와 환재 어른이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네. 나나 기범이가 직접 주선할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자네들이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이 서로 마음이 가벼울 것 같아서 말이야. 다만 외람되게도 방문 시기는 기범이 편한 때에 이우어져야 한다네. 적당히 둘러대고 기범이나 내 소개를 해 주고 일간 찾아뵙겠다 이르게.”
“어르신 말씀대로 관찰사 접견쯤은 전직 역관이나, 상인의 구실을 대고서도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경석은 말없이 보고만 있고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유홍기였다. 자신들이 이곳까지 와서 겨우 후진 양성에 힘쓰고 박규수와의 면담이나 주선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받는다는 못내 납득되지 않았다. 굳이 그럴 것이면 일부러 서찰까지 띄워 초청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자네들 경신년 난의 주동이 뉘였는지는 아는가?”
권병무는 유홍기의 대답을 뜬금없는 질문으로 대신했다.
“선왕(철종) 대에 한양 인근을 거점으로 역모를 꾀하다 토포되었던 일 말이옵니까?”
“그래 그 사건 말일세.”
“그야 홍영익 대감의 대동계가 아니었나이까?”
“그 대동계가 아직 남아 있다면? 아니, 남은 정도가 아니라 7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다면 어찌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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