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근
강사의 말에 친구는 기가 막혔다. 체력이 약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니까 누가 도와주리라고 기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근력을 키웠다. 그렇게 힘겹게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그토록 원하던 산악회에 가입했다. 거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빙벽 등반까지 한다니…. 가서 보니 친구는 로프로 몸을 묶고 곡괭이 같은 것으로 얼음을 찍으면서 까마득한 빙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그 까마득한 곳에 올라가다니…."
나는 내가 모르는 새 이루어 낸 친구의 쾌거에 입에 침이 말랐다. 뒤늦게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세계를 찾고 조금씩 이루어 나가는 것도 축하할 일이었다. 그런데 친구의 표정은 뜻밖에 어두웠다. 친구의 하소연은 이랬다. 암벽 등반을 할 때 바위를 타고 오르려면 바위의 튀어나온 부분이나 살짝 갈라진 틈을 붙잡고 올라가야 한다. 그걸 전문용어로 크랙이라고 하는데, 산악회를 따라다니면서 보니 크랙마다 이름이 다 있더라는 것이다. 영자 크랙이니 무슨 크랙이니….
그런데 이상한 건 그때마다 남자들이 킥킥거리더란 것이다.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크랙을 여자의 성기에 비유하고 있음은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영자 크랙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가 한창 유행하던 무렵에 붙여진 이름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걸 전혀 모른 채 크랙 이름을 외운다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던 친구는 불쾌감을 넘어 분노가 치밀더라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친구가 과민하다고 생각했다.
"너, 너무 경직된 거 아냐? 남근석, 여근암, 여근곡 뭐 이런 건 옛날부터 많았잖아. 성인용 유머라고 생각하고 웃어 버리면 될 걸 가지고…. 누군 그러더라,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음담패설을 할 수 있다는 거라고."
내 말을 들은 친구는 그런 내게 더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게 어떻게 같은 거야. 그런 것들은 그래도 은근한 풍류가 깃들여 있거나 민속 신앙 같은 게 깔려 있는 거잖아. 하지만 이건 음란한 상상력일 뿐이라고. 게다가 여자 회원들이 곁에 있는데 자기들끼리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낄낄거릴 때, 그때 여자들이 느끼는 감정이 뭐겠어? 수치심이라고. 어떤 땐 강간 당하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니까."
그제야 나는 친구가 느꼈을 성적 수치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친구에게 사과했다.
"남자들이 뭘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산에만 다니면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내가 산을 좋아하는 만큼 그 세계도 더욱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니까."
그래서 친구는 오랜 고민 끝에 그런 골자의 글을 산악회 홈페이지에 올렸다고 했다. 정말 산을 사랑하고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글이 올라간 후 친구는 남자회원들에게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힘겹게 선택한 그곳을 떠나야 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남녀 차별이 많이 해소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남자도 아기를 낳고 싶어요, 성형이 여자만의 전유물인가요,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뭐 이런 식의 역차별쯤 돼야 뉴스의 가십거리라도 되는 시대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완전히 착각이었다. 아직도 앞서가는, 혹은 뭔가를 개선하고자 하는 여성이 나타나면 남자들은 행여 자기들의 기득권이 훼손당할까 봐 똘똘 뭉치는 걸 볼 수 있다. 거의 본능적인 반작용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에다 알고도 귀찮아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구시대적 분위기가 구석구석 남아 있는 것이다.
그후 친구는 한 달여를 산악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은 정중히 사과하며 다시 나와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앞으로 있을 창립기념행사 준비에 필요한 영문 번역과 잡지 편집을 좀 맡아 달라고 하더라나.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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