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자연이 빚는 아이들 이야기 <산골마을 작은학교>

등록 2005.05.12 13:58수정 2005.05.1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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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비가 오는 날이나 바람이 귓볼을 간지럽히는 날에는 가슴 한 켠에 쌓아 놓았던 것을 기억들을 주섬주섬 꺼내곤 한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른다.

필자는 충남 보령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라고 초등학교를 다녔다. 또래들과 달리 한해 일찍 초등학교를 입학했는데 빨간 내복 한 벌 덕분이었다.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 병수발을 하면서 농사일과 자식들을 키워야했던 어머니는 "언제 죽을지 몰라 조금이라도 일찍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빨간 내복 한 벌을 내밀고는 여러 차례 사정을 하고서야 아들의 조기 입학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드리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도 있었듯 시골에서 내복 한 벌이면 정성의 표시로 충분했던 때다.

입학식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내 키보다 더 커 보이는 가방을 둘러매고 오른쪽 가슴에 하얀 수건을 달고 입학하던 때가 새삼스럽다. 지금 초등학생들은 깔끔한 멋쟁이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노란 콧물을 흘리며 소매에 때가 절은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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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책 <산골마을 작은학교>(소나무 펴냄)는 가슴 한켠에 쌓아 놓은채 아득하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을 돌아보게 했다.

"꽃이 피는 시기를 놓고 보면 봄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시속 900m로 오는 셈인데, 보폭이 50cm인 사람이 2초에 한걸음씩 걷는다면 봄과 동행할 수 있는 셈이다. 재미있지 않니? 봄과 함께 걸을 수 있다니. 2초에 한걸음씩 걷자면 한들한들 뒷짐을 지고 갖은 여유를 다부려야 겨우 속도를 맞출 수 있을 게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를 설레게 했던 것은 운동회와 소풍이었다. 놀이동산이 있던 것도 아니고 둘러보면 논밭과 산 그리고 바다가 전부였다. 그래도 소풍 전날이면 으레 들뜬 마음에 밤을 설치곤 했다.

어머니가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해 주신 김밥과 사이다, 새우깡 등 몇가지 과자류를 가방에 담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청팀과 백팀으로 나눠 치러지는 운동회는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콩주머니 던지기 등 가을처럼 마냥 풍성하기만 했다. 상품이라고 해 봤자 공책 몇 권, 연필 몇 자루가 전부였지만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고단한 농사일에 바쁜 동네 어른도 아들, 손자손녀를 응원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했다. 온 동네 잔치였다.


그 중심에 학교가 있었다. 한 학년에 두 반뿐이었던 내 기억 속의 아름다운 작은 학교. 겨울에는 장작 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올려 놓기 위해 복닥거렸고 점심 시간이 가까워지면 맨 아래에 놓인 도시락에서 노릇노릇 누룽지가 되어가는 냄새가 온 교실에 퍼지곤 했다.

최고의 반찬은 단연 소시지 부침. 집안 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만 싸 올 수 있었던 소시지를 하나라도 얻어 먹기 위해 소란스러웠던 작은 교실을 떠올리면 퍽 우습다. 계란 프라이도 인기 만점 반찬이었다. 친구들에게 계란 프라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도시락 바닥이나 중간에 얹혀 오던 기억이 새롭다.


<산골마을 작은학교>는 녹색연합에서 발간하는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잡지에서 글메김꾼(기자)으로 일하던 김은주, 박경화, 이혜영씨가 발로 쓴 현장 보고서다. IMF 이후 교육마저 경제성과 효율성의 잣대로 재단되어 시골 작은 학교들의 폐교가 한창일 때 이들은 전국에 산재한 작은 학교들을 찾아다녔다.

이미 시골 작은 학교들 상당수가 폐교됐지만 <산골마을 작은학교>는 땅과 삶의 내음을 몸과 마음으로 익혀가는 시골마을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공동체성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학교는 단순히 글자를 익히는 곳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중심이자 공동체 형성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어릴 적엔 굳이 비용을 들여 배우지 않더라도 상처난 곳을 소독하고 피를 지혈시키는 데 쑥이 효과적이고, 곪은 데에는 씀바귀를 부치면 '고약'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과 들에 자라는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잡초'가 아니라 적절한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논두렁, 밭두렁을 뛰놀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던 것이다. 이젠 당연하게 익혔던 그것들이 돈을 들여 특별한 시간을 내야만 익힐 수 있고 익히더라도 생활에서 별 쓸모가 없는 죽은 지식으로 전락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육조차 상품이 되고 생산만을 위한 수단의 일종으로 전락한 현실은 대안교육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양산해 내는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다. 굳이 대안교육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아도 교육이 공동체를 튼실하게 묶어 주던 그때 그 시절, <산골마을 작은 학교>는 이런 추억을 일깨우는 동시에 교육이라는 근본 취지를 반추하게 해 준다.

"숲속 작은 학교에도 봄은 왔고 새들도 지저귀겠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 개구장이들 웃음이 어디갈까?"

덧붙이는 글 | 블로그 '신새벽의 새꿈꾸기(http://blog.naver.com/storyrange.do)'에 실린 글입니다. <산골마을 작은학교>는 아이들과 평화, 통일, 문화운동을 하다가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싶다며 춘천으로 내려가 지역운동을 시작한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책입니다. 새로운 곳에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지역운동을 고민할 그녀에게 건승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 '신새벽의 새꿈꾸기(http://blog.naver.com/storyrange.do)'에 실린 글입니다. <산골마을 작은학교>는 아이들과 평화, 통일, 문화운동을 하다가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싶다며 춘천으로 내려가 지역운동을 시작한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책입니다. 새로운 곳에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지역운동을 고민할 그녀에게 건승을 빕니다.

산골마을 작은학교

김은주 외 지음,
소나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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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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