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와 함께 버려졌던 엽서가 돌아오다

방 안에 '유일하게 보관된 우편물'

등록 2005.05.16 04:02수정 2005.05.1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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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휴대전화로 세계 누구와도 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디서든 편히 인터넷을 통하여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종 통신수단의 발달이야 반겨야 할 일이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손으로 직접 쓰는 편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끔은 '손으로 직접 편지를 써 볼까'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편지를 직접 쓰는 일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별난 행동으로 생각되고는 합니다. 최첨단의 문화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몇 통쯤의 편지를 받으셨습니까? 또, 그 중 몇 통의 편지를 보관하고 계십니까?

가만히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편지들을 모아 놓았으면 족히 몇 백통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내게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니, 단 한 통의 엽서만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유난히 잦은 필자의 '방청소' 습관 때문입니다.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 터라 단 며칠만 게으름을 피우면 방이 지저분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세운 방청소 원칙이 있습니다.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리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미련 없이 버린다고 무조건 버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괜히 필요 없는 물건들을 쌓아두고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이런 원칙으로 인해 편지도 줄곧 '쓰레기'취급을 받아왔습니다. 각종 폐지들과 함께 방에서 밀려나갔지요.


열흘 전 즈음, 방 청소를 하던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이면지들을 분류하고 이면지로 쓸 수 없는 종이류를 따로 모았습니다. 그렇게 방청소를 마칠 무렵 엽서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2년 전 여름 잠시 외국에 가있던 친구가 보낸 엽서입니다.

엽서를 다시 한 번 훑고는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버릴까, 그냥 둘까.' 순간적인 고민이 끝나고 판단은 '버리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자주 만나는 친구 사이에 엽서 한 장이 대수랴!' 생각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엽서도 폐지들과 함께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넘어선 지난 밤, 외출 후 현관에 들어서는데 계단 옆쪽에 엽서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편함도 아닌 곳에 놓여있기에 궁금증이 생겨 엽서를 손에 쥐어들었습니다.

보관해 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엽서는 책꽂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보관해 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엽서는 책꽂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박성필
'박성필 앞'이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써있는 것을 보니 제 앞으로 온 것이 분명한데 발신지가 외국입니다. '누구일까'하는 생각에 바로 옆쪽을 보니 지난 해 받았던 엽서입니다. 바로 일주일 전에 버렸던 그 엽서이지요.

순간 '엽서, 네 운명은 버려질 것이 아닌가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건물 관리를 하시는 분이 폐지들을 정리하며 눈에 띈 엽서를 '혹시나' 하고는 되돌려줄 생각으로 보관해 둔 모양입니다.

"여기 와서 많은 걸 보지는 못했지만 OO이라는 나라도 어찌 보면 좋고, 어찌 보면 나쁜 것도 있더라. 차라리 한국에서 고생하는게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밥 한 줄에 6달러야. 물가도 비싸더라고.

아직 잘 모르겠다. 이민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딱 떨어지는 답이 없네. 잘 지내고 있어라."

다시 두해 전 여름에 받았던 엽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친구 녀석은 결혼을 해서 벌써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엽서에 써서 보낸 이민에 대한 고민을 읽고 있노라니 웃음이 먼저 납니다.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고민을 많이 했었는지……. 아마도 친구 녀석도 이 엽서를 다시 읽으면 웃음꽃을 피울 것입니다.

비록 폐지와 함께 버려질 뻔 했던 엽서이지만 끝내 제 눈에 다시 띈 것을 보니 이 엽서는 방에 머물러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덕분에 한 동안은 '유일하게 보관된 우편물'의 영광도 누리겠지요.

먼 외국에서 엽서를 보냈던 친구와 함께 읽어볼 그 날까지 잘 간직해 두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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