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안뜰에서 태어난 세 마리 나비 이야기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 30) 나비는 마침내 날개를 펼치고

등록 2005.05.17 18:27수정 2005.05.1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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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아침, 침대에서 빠져 나와 옷을 꿰차자마자 나는 버릇처럼 창문의 블라인드를 손으로 밀쳐 스완 플란트(Swan Plant)를 살펴보았다. 가지에 붙어서 뭔가 펄럭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지에 잎 하나 남아 있지 않으니, 그렇다면 저건 분명 막 태어난 나비임에 틀림없다!


나는 화장실도 건너뛰고 바로 카메라를 챙겨들고 안뜰로 나갔다. 과연 번데기는 찢겨져 있었고 아직 날개가 완전히 펼쳐지지 않은 나비가 스완 플란트의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가지를 꽉 움켜쥐고 날개를 말리고 있었다. 새벽녘에 날개돋이를 한 모양이다.

번데기를 찢고 태어난 나비가 휴식을 취하며 날개를 말리고 있다
번데기를 찢고 태어난 나비가 휴식을 취하며 날개를 말리고 있다정철용
아직 마르지 않은 날개를 가끔씩 펄럭거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나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감동의 물결이 밀려와 내 마음의 모래밭에 부딪혔다. 잔잔하지만 커다란 기쁨이 내 마음에 고이기 시작했다. 번데기를 찢고 나오면서 날개돋이를 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쉽기는 해도, 이번에는 온전히 태어나 저렇게 날개를 말리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날개돋이에 실패한 나비의 죽음을 목격한 나로서는 아쉬움보다는 기쁨이 앞섰다. 나는 마치 내가 날개를 얻은 듯이 기뻐하며 아침 준비하는 것도 잊고 막 태어난 이 어린 나비를 오래 바라보았다.

2.

스완 플란트는 그 열매가 꼭 호수에 떠 있는 백조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날개가 화려한 모나크(Monarch) 나비(제주왕나비과에 속하는 나비의 일종이라고 함)가 이 나무의 잎사귀 뒷면에 알을 슬어놓기 위하여 찾아오는 나무여서 '나비 나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는 나무다.


모나크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앉아 있다
모나크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앉아 있다정철용
지난 늦봄(지난 해 12월 초순)에 나비 나무의 모종 두 그루를 사서 안뜰에 심었더니, 정말 여름내 모나크 나비들이 날아와 좁쌀알보다 작은 하얀 알들을 잎사귀마다 슬어놓았다. 얼마 안 있어 나비 나무의 이파리와 가지에는 얼룩말처럼 노랗고 까맣고 하얀 줄무늬가 선명한 나비 애벌레들이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거의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난 애벌레들도 제법 생겨나 이제 나비가 되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나의 부푼 기대도 함께 자라났다.

모나크 나비의 애벌레는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선명하다
모나크 나비의 애벌레는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선명하다정철용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 보니 제법 자라난 그 애벌레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나비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들마다 잔뜩 낀 진딧물 탓인가, 아니면 눈 밝은 새들의 먹이가 되었는가. 나중에서야 나는 이 애벌레 실종사건의 범인이 음흉한 사마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통통한 나비 애벌레를 꽉 붙잡고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 이 포식자의 식사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으면서도, 이 무자비한 먹이사슬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애벌레를 잡아 먹고 있는 사마귀의 모습
애벌레를 잡아 먹고 있는 사마귀의 모습정철용
나의 개입이 없이도 나비는 결국 사마귀를 제압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까지 줄기차게 날아와 알을 슬어놓는 나비의 부지런한 물량 공세를 포식자 사마귀도 감당하지 못했다. 마침내 나비 나무에는 수십 마리의 크고 작은 애벌레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제는 잎사귀들과 여린 가지까지도 쉴 새 없이 갉아먹는 애벌레들 때문에 나비 나무의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개입하지 않았다. 결국 거의 5cm도 넘게 크게 자라난 몇몇 애벌레들 중에서 세 마리가 번데기가 되어 매달린 지난 4월초쯤에는 나비 나무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번데기가 되려고 꽁무니에서 뿜어낸 실에 매달린 애벌레
번데기가 되려고 꽁무니에서 뿜어낸 실에 매달린 애벌레정철용

애벌레는 매달린 지 하루만에 누에처럼 생긴 연두색 번데기로 변한다
애벌레는 매달린 지 하루만에 누에처럼 생긴 연두색 번데기로 변한다정철용
처음에는 누에고치처럼 생겼던 번데기는 2∼3일 지나자 연두색 등롱처럼 매달려 안뜰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계인의 작은 우주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쪽에 동그란 뚜껑을 용접해서 연결해 놓은 듯한 부위를 따라 쭉 둘러 쳐진 황금빛 테와 아래쪽에 마치 제트 추진 연료 분사구처럼 새겨져 있는 두 개의 황금빛 점 때문에 번데기는 마치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고 있는 외계인의 우주선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초록 우주선에서 태어나는 것은 외계인이 아니라 나비였고, 이 우주선의 동력은 제트 추진 연료가 아니라 나비의 날개였다.

2~3일이 지나면 번데기는 등롱처럼 빛나는 모습이 된다
2~3일이 지나면 번데기는 등롱처럼 빛나는 모습이 된다정철용

4주가 지나 까맣게 변색한 번데기의 속에 나비 날개의 무늬가 보인다
4주가 지나 까맣게 변색한 번데기의 속에 나비 날개의 무늬가 보인다정철용
그 이륙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몹시도 조바심 나는 것이었지만 카운트다운은 길어서 번데기가 되고 나서 약 한 달이 지난 5월 6일이 되어서야 첫 나비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나비의 탄생 과정을 놓치고 말았다. 그 전에 초록색 번데기는 짙은 청록색으로, 마침내 까만색으로 변색이 되어서(사실은 번데기를 감싸고 있는 막이 얇아져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나비의 까만 몸통이 보여서 까맣게 보이는 것임) 이제 곧 날개돋이가 있겠구나 생각하며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도 그만 그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다.

첫 번째로 태어난 나비는 한쪽 앞날개가 접혀 끝내 날아오르지 못했다
첫 번째로 태어난 나비는 한쪽 앞날개가 접혀 끝내 날아오르지 못했다정철용
그 날 외출에서 돌아와 나비 나무를 살펴보니,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번데기 하나가 찢겨져 있고 그 아래쪽 잔디밭에 나비 한 마리가 뒤집힌 채로 떨어져 있었다. 날개돋이를 하고 나서 가지에 붙어 있지 못하고 잔디밭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작은 나뭇가지로 집어 바로 세워주었는데도 날아가지 않기에, 아직 날개가 다 마르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시간이 다 되었어도 나비는 잔디밭을 기어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비의 오른쪽 앞날개가 접혀져 있었다. '불개입 원칙'을 상기하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손으로 그 접혀진 앞날개를 조심스럽게 펴주었다. 나비는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나 앞날개는 다시 접혀졌고 나비는 내 손길을 피해 잔디밭으로 뒤뚱거리며 기어갔다.

두 번째로 태어난 나비의 날개는 걸레처럼 쭈글거려 끝내 펼쳐지지 않았다.
두 번째로 태어난 나비의 날개는 걸레처럼 쭈글거려 끝내 펼쳐지지 않았다.정철용
두 번째로 태어날 나비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난 5월 10일, 아내와 함께 빅토리아 할머니 집에 다녀와서 보니 속이 들여다보여 나비 날개가 선명하게 보였던 다른 번데기 하나가 역시 찢겨져 있었다. 나비 나무의 바로 밑에서 마르지 않아 아직도 심하게 쭈글쭈글해진 날개를 단 애처로운 나비의 모습을 보면서도, 내 마음속에서는 또 그 순간을 놓쳤다는 실망감이 더 앞섰다.

나중에 이 나비 역시 날개를 끝내 펴지 못하고 잔디밭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의 실망은 슬픔이 되어 그리고 자책이 되어 아프게 내 마음을 찔렀다. 5월 14일, 변색이 시작된 마지막 세 번째 번데기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아, 이제는 네 탄생의 순간을 내가 지켜보지 못해도 좋으니, 제발 온전하게 날개돋이를 해서 저 푸른 가을 하늘로 날아가렴.

3.

내 소망이 통했던 것인가. 아직 캄캄한 새벽녘에 날개돋이를 해서 오늘 아침에 그 아름다운 날개를 내게 보여준 세 번째 나비는 마당에 떨어지지도 않았고 날개가 접혀져 있지도 않았다. 나비 나무의 가지를 꼭 움켜쥐고 아침 서늘한 가을바람에 날개를 말리고 있는 어린 나비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잔디밭을 기어 다니던 첫 번째로 태어난 나비는 어제 이후로 꼼짝도 안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죽은 모양이다. 두 번째로 태어난 나비는 그보다 더 단명해서 이틀 만에 개미들의 밥이 되었다. 아,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가진 날개가 얼마나 슬펐을까. 활짝 펴지지도 않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날개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날개가 아니라 멍에를 짊어지고 짧은 생애를 살다간 이 불운한 나비 두 마리에게 부디 축복 있으라.

오늘 태어난 세 번째 나비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탓인지, 좀처럼 하늘 높이로는 날아오르지 않고 짧게 날아다니며 안뜰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있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정든 땅을 그렇게 훌쩍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러나 오늘 태어난 세 번째 나비야, 네 앞에 남아 있는 날은 그리 길지 않단다. 가을의 햇빛이 남아 있는 동안 죽은 저 두 나비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려면, 이제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부지런히 네 짝을 찾아야 된단다.

그리고 곧 다가올 겨울아, 가을 끝자리에 태어난 이 나비를 위하여 너도 조금만 고삐를 늦춰줄 수 없겠니. 내리는 빗방울에 날개를 적시고 있는 나비 앞에서 나는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햇빛 환한 맑은 날이 나비의 첫 비행 앞에 펼쳐져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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