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오마이뉴스 이종호
"어떻게 80년대의 아픔을 그런 식으로 보도할 수 있느냐?"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의 '병역기피용 단지 의혹' 기사를 쓰고난 뒤 한 386 선배로부터 들은 핀잔이다. 이 의원이 해명한 것처럼 운동의 신심을 다지기 위한 '단지'였다면 정말 가슴 뜨끔한 얘기일 것이다. 기자도 그의 해명이 '진실'이길 바란다.
그런데도 계속 걸리는 대목이 있다. 이 의원이 왜 말을 바꾸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가 2003년 초 언론에 해명한 내용과, 작년 자신의 저서 등을 통해 밝힌 내용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의혹의 실마리를 스스로 제공한 셈이다.
이 의원은 자신의 저서 <우통수의 꿈>과 19일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연세대 학생운동 시절 변절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절대 변절하지 않겠다'는 혈서를 썼다고 밝혔다.
하지만 19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 의원은 2003년 초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시절 동아 기자에게 "85·8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돼 인천 부평의 조그만 가내 주물공장에 위장취업해 있을 때 혼자 기계를 다루다가 사고로 손가락이 잘렸다"고 해명했다.
당시 이 의원은 '산재'로 손가락을 잘렸다는 장소(부평)로 동아 기자를 데려갔을 정도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당시 그의 부인도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려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2003년 초 "주물공장에서 사고로"... 2003년 10월 국감 "대학교 때 다쳤다"
이 의원의 '병역기피용 단지 의혹'은 현 정부 출범과 함께 소문으로 나돌아 다녔다. 당시 일부 언론들은 은밀하게 이 문제를 취재했지만 보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공장투신중 산재로 손가락을 잘렸다'는 이 의원쪽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의원은 나중에 말을 바꾸었다. 그는 지난 2003년 10월 11일 국회운영위의 대통령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당시 그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노무현 정부의 핵심실세였다.
당시 김학송 한나라당 의원이 이 실장을 불러놓고 "군에 안간 이유가 무엇이냐?"고 추궁했다. 이에 이 실장은 "자료로 설명드리겠다"고 피해가려 했지만 "간단하게 답하라"는 김 의원의 요구에 그는 "오른손 손가락이 없어서 안가게 됐다"며 "86년 대학교 때 다쳤다"고 밝혔다.
이것이 '병역기피용 단지 의혹'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해명이었다. <월간조선> 6월호에서 물고넘어진 "다쳤다"는 대목만 빼면 이 의원이 현재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이 의원은 이후 병역기피용 단지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일관되게 '혈서용 단지'라고 반박했다. 그가 국정상황실장을 그만두고 17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상대후보들은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넘어졌다. 그때마다 그는 "전두환 정권 당시 친구들이 분신 등으로 죽어갔다"며 "나는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혈서를 써서 선배에게 보냈다"고 해명했다.
당시 조규오 민주노동당 후보가 한 토론회에서 "나도 노동운동 하면서 여러번 혈서를 썼는데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는 드물다"며 "순수성에 의문이 든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자 이렇게 반박한 적도 있다.
"군대 가는 게 쉽겠나, 독방 가는 게 쉽겠는가. 당시 학생시위 하면 당연히 군대 안가는 것이었다. 1남6녀의 장남이다. 전두환 시절 학생들이 죽고 분신하고 참을 수 없었다. 죽고 싶었다. 아마도 그 격정을 이기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왜 처음부터 '혈서용 단지'라고 밝히지 않았을까?
사실 80년대 운동권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운동권 중에는 아주 드물긴 하지만 손가락 자해를 통해 병역을 면제받은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만 받더라도 실형으로 간주돼 소집면제되는 경우가 많아 굳이 손가락까지 자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 의원은 83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86년에는 학생운동 연합기관지였던 <백만학도>를 제작했다는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던 터였다. 체포되면 자연스럽게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