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73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5.19 21:27수정 2005.05.1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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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얼마나 흘렀을까? 한나절? 하루? 어쩌면 그 이상을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김영중은 심한 두통을 느꼈다. 소 등에 실린 채바구니 속에서 한참을 흔들린 까닭인지, 술 속의 약 탓인지 분간할 수 없이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바로 뒤에서 또 다른 소 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영일이는 바로 뒤에 실려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영중은 무사한지 소리를 내어 보고 싶으나 재갈을 물린 입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리뿐 아니라 눈가리개를 하고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발까지 묶여 있자니 이 좁은 채바구니 안에선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어찌나 용의주도한지 두어 차례 소피를 위해 꺼내 준 적을 제외하곤 말조차 붙이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소피 볼 때조차도 결박을 풀지 않고 자신들이 손수 바짓가랑이를 내려 주었다.

‘그 날 안심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안주 장을 바라고 나섰다는 장사치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마두산 사건의 패거리 소굴로 들어갈 날을 기다리며, 팔자에 없는 주막 중노미 노릇으로 소일하고 있던 차에 붙임성 있게 다가온 젊은 장사치들의 말을 쉽게 받은 것이 탈이다.

한 잔 두 잔 주는 술을 받아 먹다가 어느 순간엔지 정신을 놓았다. 주모와 짜고 술에 몽환약을 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때 술로 닳고 닳은 몸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을 리가 없다.

‘내 이 연놈들을 그냥…’


보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살갑게 정붙이고 지냈는데 결국 이런 대접을 받은 것에 은근히 부아가 일었다.

‘허긴, 어쩌면 잘 된 일이야. 어차피 본거지로 들어가야 할 몸,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이토록 험하게 옭아매어 끌고 가는 처사는 마땅치 않았지만 그들의 본거지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크게 손해는 아니었다. 더구나 주막에서 그 모화라는 계집이 자꾸만 영일에게 눈치를 주어 불길한 마음마저 일던 때였다. 처녀 총각이 눈이 맞는 것이야 누가 무어라 할까마는 그 모화라는 계집의 눈매가 영 마음에 걸렸다.

‘참 묘한 상이야. 상은 참한데 도화살이 뻗친 것도 같고 자태는 다소곳한데 기운이 격하고….’

더 큰 문제는 그 계집이 그 주막의 중노미에게도 눈길을 준다는 점이었다. 뭔가 목적이 있는 눈길, 연정이 아닌 꼬임의 눈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일을 바라보는 눈빛도 그 중노미를 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괜히 엮이기 전에 그 곳을 빠져 나온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일송이는 우리가 이렇게 얹혀 나오는 걸 봤을까?’

주막을 일송이가 감시하기로 되어 있었고, 주막 앞 숲에서 뿜어져 오는 일송의 눈길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 확신은 없었다. 워낙 장기간 자신들이 주막에 매여 있었고 장사치들에게 속아 실신해 끌려 나온 시각도 밤이거나 이른 새벽이었을 테니, 그 때 일송이 지켜보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질세.”

영중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가 멈추어 서는가 싶더니 누군가 채바구니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어 두어 사람이 영중을 들어내어 발목의 결박과 재갈을 풀어주었다.

“여긴 어디요? 영일아, 영일아!”

재갈이 풀리기 무섭게 영중이 영일을 찾았다.

“예, 형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전 괜찮아요.”

영일이 뒤 쪽에서 대답했다.

“자, 자네들은 이리 따라 오게.”

누군가 영중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주막에서 만난 장사치들과는 목소리가 달랐다. 소가 푸레질 하는 소리는 뒤 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들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산길로 걸었다.

“어차피 피차 동패가 될 처지인데 이거, 눈이라도 좀 풀어줍시다. 이건 원 뭐가 보여야 말이지.”

영중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자꾸만 외길 산길로 이끄는데 발부리가 채이길 여러 번이었다. 팔짱을 단단히 낀 자가 번번이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손이 뒤로 묶인 탓에 코가 깨져도 몇 번은 깨졌을 것이었다.

“허, 그놈 참 말 많다. 때 되면 어련 알아서 풀어줄까! 그리고 누가 네 놈과 동패래? 우리가 무슨 화적패라도 되나, 같은 상단이라도 되나? 네 놈이 언제 날 봤다고 동패야.”

자신과 비슷하거나 위 연배의 목소리였다. 별반 노기 섞인 목소리는 아니어서 적이 안심은 되었다. 그러나 결국 눈가리개는 풀어주지 않았다. 길 같지 않은 산등성이를 한 식경이나 올랐을까. 어디선가 나무 타는 불내가 풍겼다.

“킁킁….”

가쁜 숨을 쉬는 가운데 영중이 코를 벌름 거렸다.

“맞네, 헉헉. 다 왔어. 우리 숯막일세. 며칠 여기 있다 보면 자넬 찾는 사람들이 올 게야. 함부로 산을 내려갈 생각은 말게. 길을 찾지도 못하겠지만 자네들한테나 식솔들한테나 그게 서로 좋아.”

영중을 끌고 온 사내가 사람 좋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오금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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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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