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82

남한산성 - 개의 혀

등록 2005.05.30 17:04수정 2005.05.30 18:13
0
원고료로 응원
잠시 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마부대가 허겁지겁 홍타이지에게로 와 엎드리며 청했다.

“조선군이 비록 약하다고는 하나 얕보아서는 안 되옵니다. 광교산에서의 일을 잊었사옵니까?”


그 말에 홍타이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의 사위인 백양굴리와 여진 장수 투루아얼이 수천의 병사들과 함께 전사한,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이후로 유일한 패배가 홍타이지의 마음속에 흉으로 남아 있었다.

“저 두 장수가 용맹하긴 하나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니, 병사 일천만 주신다면 뒤를 엄호하겠나이다.”

홍타이지는 마부대의 청을 받아들이며 조건을 걸었다.

“그대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조금 늦게 출발하여 다른 장수들의 공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

마부대가 혹시 공을 탐하여 일을 꾸미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홍타이지가 한 소리였지만 마부대는 개의치 않았다. 같은 때 홍명구가 이끄는 조선군은 중간에서 합류한 의용병 백여 명을 만나 한층 더 사기가 올라 있었다. 의용병을 이끈 자는 차예량이라는 자로서 민첩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사람이었다. 윤계남은 차예량의 고향을 물어보았다.


“본시 어릴 적 의주에서 살았으나 집안이 한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장판수는 고향과 가까운 곳의 사람을 만났다며 철없이 좋아했다.


“의주라! 내래 용천에서 살았습네다!
“용천에서 살았습니까? 이거 동향이나 마찬가지구려!”

장판수는 문득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이 생각났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는 일은 이제 포기한 지금, 전쟁이 끝난 다 해도 장판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이 막힌 사람은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앞으로 전진, 또 전진하다가 벽에 부딪히고 돌아서서 되짚어 가면 될 것을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피를 흘려 가다가 스러져 가는 법이오.”

장판수가 다시 현실에 귀를 돌렸을 때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는지 차예랑이 장광설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 때 앞서 갔던 척후병이 달려와 장판수와 윤계남에게 보고했다.

“아뢰오! 앞에 주둔했던 오랑캐의 병사들이 진지를 두고 도주하고 있사옵니다!”

한바탕 적과의 싸움이라도 예상했던 장판수는 약간 김이 빠졌지만 일단 대오를 멈춘 채 보고를 위해 후진에 있는 홍명구를 찾아갔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장판수가 찾아갔을 때 홍명구는 유림을 앞에 두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초관 장판수가 오긴 했지만 조정의 명을 받들어 왔다는 물증은 없지 않습니까? 행여 그 자가 오랑캐들에게 매수되어 우리 군사들을 함정으로 밀어 넣는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유림의 말을 들은 장판수는 기가 막혀 소리쳤다.

“병사나리! 여기 내래 왔으니 정히 의심된다면 이 칼로 제 목을 치고 산성으로 돌아가시오!”

유림은 움찔거리며 장판수를 쳐다보았다. 장판수는 아예 칼집을 끌러 유림에게 건네고 있었다.

“장초관은 경거망동을 삼가라!”

홍명구의 호령에도 장판수는 유림을 노려보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자네를 의심하는 말이 아니라 서면으로 된 조정의 명이 없이 군사들을 움직이는 게 과연 옮은 일인가를 따지던 참이네만.”

머쓱해진 유림은 말을 돌렸지만 속으로는 이미 홍명구의 뜻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고 있었다. 장판수는 유림에게서 눈을 돌려 홍명구에게 주둔하고 있던 청의 소부대가 달아났다는 보고를 올렸다.

“계속 전진하라. 근왕병의 임무는 적을 무찔러 종묘사직을 구원하는 데에 있는데 어찌 사소한 종이쪼가리에 연연하겠는가?”

결전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 홍명구의 어조와 말투는 전에 없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4. 4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5. 5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