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의 허리케인 죠, 나에게 말을 걸다

[내 인생의 멘토] 치바 테쯔야의 <내일의 죠>

등록 2005.06.08 03:57수정 2005.06.0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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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예요?"


<내일의 죠> 표지 사진
<내일의 죠> 표지 사진
참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질문. 아마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하다 못해 입사 지원서에까지 '감명 깊게 읽은 책'란이 있을 정도라더군요. 하긴 책이 사람을 만들고, 읽은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좀 상투적이긴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니만큼 어떤 책을 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 스스로가 이 질문에까지 정답을 만들어 놓으려고 하나 봅니다.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등등 소위 '입증된' 작가들의 작품들, 혹은 좀 고상한 제목을 단, 품격 있어 보이는 책들을 대야 체면이 서는 모양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 그 책들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으레 그런 식으로 대답이 나오게끔 되어 있는 사람들의 의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뿐이죠.

그런 면에서, 제가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참 의외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고전도 아니고, 얼핏 보기에 그리 심오한 사상을 담은 것 같지도 않은, 권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만화거든요.

<내일의 죠>(원제: あしたのジョ-). 제목은 몰라도, <도전자 허리케인>이라고 하면 20대 중반부터는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실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10년도 더 전에 국내 모 방송사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김종서의 주제가가 꽤 인상적이던 그 만화 영화를 보면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권투선수 흉내를 한 번쯤 내 보지 않은 남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때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지만, 첫 회를 보았을 때 느꼈던 묘한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허름한 코트와 빛바랜 모자를 쓰고 항상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진, 하지만 링 위에서만큼은 넘치는 생명력을 보여 주던 죠의 모습은 단순히 '멋지다'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한, 왠지 모르게 가슴을 저려오게까지 만드는 매력이 있었죠.


그 이후, 야부키 죠의 이글거리는 듯한 눈빛을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이 작품이 국내 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만화책으로 다시 발간된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습니다. 시내 서점은 물론이고 PC통신(당시는 인터넷 보급률이 낮던 시기인 터라)의 온라인 헌책방까지 이 잡듯 뒤져 20권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정쩡하게 불완전 연소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진 않아. 아주 짧은 순간일지언정 눈부실 정도로 붉게 달아오르는 거야. 그리고 그 후엔 새하얀 재만 남는 거지. 타다가 마는 일은 없어. 오로지 재만 남는 거야."(19권 중에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명대사일 겁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매 순간을 후회 없이 보내는 것'은 아름다운 삶들의 공통분모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고, 한 순간도 결코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던 죠의 짧은 생애는 제 인생에 너무나도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내게 주어진 이 삶과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준, 내 안에 도사린 일말의 안이함마저 허락하지 않고 끝끝내 채찍질을 가하던 죠의 아름다운 영혼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삶의 기저에서 저를 떠받치고 끌어 준 소중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짐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 저 자신이 모든 것들로부터 '편안하게 무감각해지고픈' 욕구를 가질 때, 죠의 그림자는 제 안에서 빠져나와 저를 짓누릅니다. 불이 꺼져 가고 있다며 소리칩니다. 새하얀 재가 아닌, 타다 남은 검은색 재는 필요 없다며 저를 꾸짖습니다. 그에게 떳떳하지 못한 순간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떳떳하지 못할 때, 그를 만나려 책을 펴도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는 제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가 저를 꾸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오랫동안 안이한 시간을 보냈다며,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합니다. 사실 일어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 편안함에 익숙해져버린 제게, 죠의 외침은 그저 짐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영영 그를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또 다시 불을 지펴 봐야겠습니다. 과거 그와 함께 저 자신을 활활 불태웠던 기억을, 그 희열을 다시 한 번 맛보아야겠습니다.

죠가 마지막 미소를 짓던 바로 그 순간과 같이, 진정으로 편안한 순간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순간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새하얗게' 말이죠.

덧붙이는 글 | '여러분 인생의 '멘토'는 무엇입니까?'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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