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다 보면 종종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특히 인권침해로 인한 사망사고의 경우 피해자의 유족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활동가 모르게 원래의 목적과 상이한 내용으로 이면합의를 한다거나, 피해 사실과 부합하는 해결책이 나오면 갑자기 돌변해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들러리' 서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사명감 대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 되풀이되면 활동의 진정성도 훼손되기 일쑤다. 미리 결론을 내린다거나 피해자의 처지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닌 중재자 노릇을 하게 된다. 이는 인권 운동가로서의 생명력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레슬링 유망주 고 김종두군의 아버지를 비롯한 유족과 함께 한 지난 15개월은 몹쓸(?) 운동가의 강박증을 떨쳐내고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는 중요한 여정이었다. 고 김종두군은 전국체전에 참가하기 위해 무리하게 체중을 감량하다 2003년 10월 숨을 거뒀다.
"목표 중량 46kg, 현재 중량 52.5kg, 남은 중량 6.5kg…."
그가 쓴 일기장을 보면 체중 감량에 대한 그의 중압감이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종두군의 사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종두의 죽음은 무리한 체중 감량을 위해 강제로 훈련 받다가 사망에 이른 사건으로 가혹행위를 동반한 인권 유린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한국 스포츠계의 성적 지상주의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0월 22일 장례식이 치러진 후 종두군의 안타까운 사망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종두군의 부모님이 찾아온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부모님은 "해당 관계 기관에서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건의 책임과 진실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며 분노했다. 그리고 "어디에다 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후속 대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냥 '안타까운 죽음'으로 폄하되고 사건의 진실이 호도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종두군의 아버지 김완철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무실에 들러 그간의 상황이며 종두의 과거사, 부모님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얘기를 전했다. 내가 속한 전북평화와인권연대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대책을 하나씩 마련했다.
김완철씨 또한 자식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며 진상조사와 책임규명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동계 체전 개막식이 개최되는 단상까지 올라가서 체육 당국을 거세게 비난하고 캠페인, 탄원, 교육청장 면담 요구 같은 일을 벌였다. 그러나 교육청과 관계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김완철씨는 승강이 도중 경찰서에 끌려갔다 나오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 '이심전심'으로 함께 했으니, 눈물 범벅 그 자체였다. 김완철씨는 "평범한 시민이기에 당해야 하는 고통"이라며 괴로워했다.
이 사건은 결국 법정으로 갔다. 관계 기관의 무성의로 인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는데 이는 지금 생각해 봐도 부모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었다. 보상금 때문에 저러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종두군 부모님은 무척 괴로워 했다. 결국 보상금과 추모비 건립 등에 합의했고,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감독과 코치에게는 벌금형이 선고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고 김종두군의 1주기가 되던 날 김완철씨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부덕해 모자란 부분이 많이 있다"며 "엘리트 스포츠 교육의 시스템이나 학생들의 성적이 학교의 명예와 선생님들의 인사에 반영되는 그런 관행이 사라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교육청 당국자도 참석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에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부모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 추모비 건립을 둘러싸고 아버님의 발길이 잦아졌다. 이제는 친숙해져서 서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웃음 띤 얼굴을 기대하고 싶지만 종두군의 죽음 뒤 가족에게 많은 변화가 있는 듯 싶었다. 그래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피해자와 유족의 상담을 자청해서 하기도 하고, 사무실에 나와 무엇이라도 돕고 싶다는 말을 건네기도 하면서 종두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6월 8일에는 한국 레슬링의 큰 별이 되고자 했던 김종두군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아들뿐만 아니라 운동을 자신의 삶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을 위해 15개월 동안 통한의 시간을 보낸 종두군 아버님을 비롯한 모든 유족을 '인권 지킴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소중한 인연이 되었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5월호(5월 31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김종섭 기자는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사무처장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