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89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6.11 11:52수정 2005.06.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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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다 하세. 내 뜻과 자네의 뜻이 같다 하세. 그래서 내가 무얼 어찌하라는 겐가? 자네들을 묵인이라도 하라는 게야?”

박규수의 말이 ‘너’에서 ‘자네’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대감께오선 노론 낙론(洛論)계에 속하는 분이시니 조정과 재야 정객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옵니다.”

“자네를 버려 놓은 책임을 져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더러 적도의 수괴가 되란 말인가?”

“굳이 어렵게 받아들이자면 그런 셈이지요. 제겐 힘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조정의 틀을 뒤바꾸는 것쯤 내일이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온데 그 뒤의 일이 문제입니다. 국론을 통합하고 대의를 이끌어 갈 구심점이 없습니다. 저는 한낱 한미한 역관 집안 자식이옵고, 그저 혈기왕성한 무인에 불과할 뿐이지요. 허나 대감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전에 여기 평안도를 든든히 장악해 주신다면 준비과정에서도 큰 힘이 됨은 당연한 이치이고요.”

“내 생각에도 자넨 지나치게 젊고, 이상으로 가득 찬 대 큰 무인일 뿐이구먼. 그깟 대나무에 화약 넣은 폭약과 약포로 방포하는 총포 몇 점 지니고 있다 하여 하루아침에 조정을 뒤엎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생각하는가?”

“예.”


권기범은 물은 사람이 민망하리만치 밝고 힘차게 대답을 올렸다.

“중국도 수천에 불과한 서양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고 일본의 막부도 미리견 군함 몇 척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단지 무기의 차이에서 기인한 단순한 승패가 아니옵고 시대의 사조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조선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 사조를 조선에서 만큼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대감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저희 군세(軍勢)가 그리 작질 않습니다. 중앙 5군영의 군세가 오늘 평안도에 모인다 해도 닷새 안에 깨뜨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으리의 참여 여부는 절대변수가 아니오라 그리 됐으면 하는 최선의 방안일 뿐입지요.”


“그럼 날 빼놓고 잘 하시게.”

박규수가 빈정대는 어투로 일갈했다.

“오늘 하루 말씀으로 근본도 모르는 이의 횡설에 동조해 주시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바라옵기는 늘 저희를 염두에 두시라는 것입니다. 평안도 내에서 대감께 누가 되는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추이를 지키시다가 심중에 결심이 서시거든 뜻을 함께 하시면 되옵니다. 그리고 두어 달 뒤 나으리께서 저희 군세를 직접 확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니 그 전에 섣부른 시도는 자제해 주실 것을 청할 뿐입니다. 단 두어 달 만이라도.”

“두어 달이라…. 혹 기일을 벌어놓고 그 사이 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은 아닌지?”

“소인이 품은 목적이 있다하나 어찌 얄팍한 술수로 대감을 대하오리까. 역매, 대치 형님과의 인연을 봐서라도 그리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 그렇다 치세. 만일 내 뜻이 변해 그대와 뜻을 합하고 싶다면 어디로 사람을 보내면 되겠는가?”

박규수가 넌지시 떠봤다.

“저희는 항상 대감 곁에 있을 것이옵니다. 대감께서 어느 쪽으로 길을 정하셨든 저희가 먼저 알게 될 것이니 염려 놓으소서.”

권기범이 빌미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어찌 들으면 우롱이요 어찌 들으면 경고 같은 묘한 말을 남겼을 뿐이다.

5

“병방, 영감께오선 안에 계시오?”

윤석우 군관이 일송과 함께 들어서다가 동헌문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한 채 안채를 살피고 있는 병방에게 물었다.

“엥? 아이고 깜짝이야. 난 또 누구라고… 비장 나으리시구먼. 어디서 오시기에 웬 비를 이리…”

뒤에서 난 소리인지라 병방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가 금세 안도했다.

“관찰사 영감께오선 안에 계시냔 말이오.”

윤석우가 다시 물었다.

“계시긴 한데, 긴한 손님이 오셔서설라무네….”

병방이 말을 얼버무렸다.

“얼마나 긴한 손님이길래? 기다리려 하였으나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리 나섰소. 나 또한 급히 긴한 말씀을 올려야 하는 처지라….”

“저… 그것이… 저 안의 분위기가 도통 묘해서.”

“묘하다니?”

“영감께오서 노성(怒聲)을 내어 부르시기에 황급히 대령했더니 그냥 딴 말씀으로 얼버무리시더란 말입니다. 제가 눈치 하나로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자가 아니겠습니까? 혹 위협이라도 받으시는가 해서 가만히 살펴보고는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냥 도란도란 이야기소리만 들리니 이거 원 상황이 어찌되어 가는지….”

“뭣이? 그럼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윤석우가 병방을 밀치듯 제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우장을 갖춘 누군가가 문 안쪽에서 막아섰다. 따라 들어서던 일송도 멈칫했다.

“지금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조용히 말했지만 단호했다. 윤석우가 가만히 허리에 찬 환도자루에 손을 가져가려다가 상대가 병장기를 지니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그만 뒀다. 설사 품 안에 비수가 숨겨져 있다 해도 자신이 더 빠를 터였다.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를 하는 게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뒤에 있던 일송이 윤석우의 앞으로 나서며 으름장을 놨다. 일송은 병장기라곤 품속의 비수 한 자루뿐인지라 은근히 팔짱을 끼며 손을 가슴께에 대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동헌 안채에 가깝게 서 있던 다른 호위도 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삿갓에 우장을 갖추었을 뿐 별다른 무기가 몸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비켜라. 관에서 관원의 앞을 막은 행위만으로도 이미 네 놈은 장형을 면치 못할 터!”

윤석우가 사내를 손으로 밀치며 들어서려하자 사내가 살짝 피하며 윤석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오른 손목을 잡아 옆구리 뒤로 돌리며 엄지를 꺾었다, 싶은 순간 윤석우가 손목을 틀며 상대의 손아귀를 벗겨냈다.

[파-]

연이어 구수(鉤手:손가락을 모아 갈고리처럼 만드는 손동작)로 상대의 팔을 감고 잡아채며 상대의 허리에 왼쪽 권(拳)을 질렀다. 그러나 사내는 왼손 바닥으로 윤석우의 주먹을 받아냈다. 밀쳐냈다고는 하지만 의외의 공격에 흠칫 놀란 사내가 서너 걸음을 뒤로 물렸다. 허리의 절(節)을 노리고 들어온 입권(立券: 세워 지르는 주먹)에 그대로 노출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긴장이 될 만도 했다.

다가서던 다른 사내도 그 자리에 선 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일송도 정전방(子午)으로 손을 모으며 자세를 잡았다. 눈, 목, 장기, 음부 등 몸의 정면에 위치한 모든 급소를 감싸쥔 안정된 방어세였다.

“관찰사 영감께서 직접 하명하셨습니다. 아무도 못 들어가십니다.”

뒤로 물러났던 사내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몸을 바로 세워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한 입신중정(立身中正)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체의 움직임에 따라 상체가 좌우되기도 하고 손발에 들어가는 힘의 양에 따라서도 어깨가 들리거나 내려가는 것이 입신중정이다. 이런 자세를 정확히 유지한 채 위치를 지키는 것으로 보아 오래도록 무예를 연마한 자가 분명했다.

‘이 자들 봐라? 내뿜는 기가 없이 서 있었는데 내 팔을 꺾으려 들었다. 게다가 내 공격을 피해내다니….’

“나와 영감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수작부리지 말고 물러나라. 내가 직접 뵈어야겠다.”

말은 이리 하면서도 윤석우는 아직 칼을 뽑지 않았다. 아직은 이들이 누군지, 대동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 섣불리 저들에게 살수를 쓸 수는 없었다.

“병방, 지금 영내에 수직하는 사령들이 있다면 이곳으로 이끌어 오시오. 비 때문에 소용이 없으니 활이나 화약병기 말고 모두 냉병기(冷兵器: 칼, 창 등의 무기)를 지참하라 이르고.”

윤석우가 뒤에서 옴짝달짝 못 하고 있는 병방에게 나직이 전했다.

“중군(中軍) 나으리께도 여쭐갑쇼?”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사령을 불러 문들을 봉쇄하고 이쪽을 지원하는 게 급선무요.”

병방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벗어나게 된 것이 다행인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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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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