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호가 그려 주는 유시민

새 책 <지승호의 인물탐구 1 - 유시민을 만나다>를 읽고

등록 2005.06.12 14:19수정 2005.06.1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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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라인
유시민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얼마 전 집권 여당 전당대회 당시 난타전의 중심엔 관록의 다선 의원도 아니고, 특정 지역 수장도 아닌 초짜 정치인 유시민이 있었다. 유시민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그가 현실정치권 무대의 한 복판에 섰다는 건 부인할 수 없게 됐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아니 거의 유일한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의 새 책은 바로 그 유시민을 해부한다. 김규항에 의하면 지승호는 마치 ‘풍찬노숙하듯’ 견뎌야 하는 열악한 한국의 풍토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가고 있는 ‘개척자’적 인터뷰어다. 상대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해 끝을 보고야 만다는 차력적 근성으로 정평이 난 그가 이번엔 정치권 돌풍의 핵 유시민을 들이댄다.


이 책은 지승호를 비롯해 정혜신, 한홍구, 김정란, 유시춘 등의 유시민 평으로 구성된 1부와 유시민 인터뷰인 2부로 구성돼 있다. 물론 말미엔 저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부록으로 붙여 넣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유시민 의원이 직접 교정을 본 ‘정본’ 항소이유서란다.

유시민은 80년대에 반독재 투쟁을 경험하고 현재 ‘개혁진영’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열혈들을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다. 그에게선 80년대, 청춘을 ‘민주주의의 제단’에 오롯이 바쳤던 청년들의 미덕과 아쉬움이 함께 보인다.

유시민이 주인공인 책에서 유시민 소개가 나오는 건 기본. 유시민이 직접 말하는 유시민과 함께, 주위 사람들이 들려주는 과거 에피소드들이 차곡차곡 들어있어 유시민을 넘어 그를 배출한 ‘시대’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건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꽤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많다. 물론 그 흥미가 단지 재미꺼리는 아니다.

지금이야 민주주의를 위해 후원금 좀 내고, 놀러갈 시간 아껴 촛불 집회 정도 나가주면 되지만 유시민들이 청년일 땐 목숨, 최소한 인생이라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터. 유시민이 학교에서 제적당했을 때 어머니께서 사흘밤낮을 우셨다는 얘기는 자식의 인생 걱정에 애가 끊어지는 당시 운동권 부모님들의 마음이었으리라.

5.17 때 학교를 지키다 계엄군에 끌려간 후 온갖 흉흉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유시민이 권총을 이마에 들이댄 군인에 의해 끌려갔다고 했고, 혹자는 이미 죽었다고도 했다. 생사를 모르고 지낸 그해 5월의 보름 동안은 정말 하늘과 땅이 맞붙는 시간이었다”라는 누나 유시춘씨의 회고는 절절하다.


유시민이 끌려갔던 그날, 5.17 밤 10시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군인들이 밀어닥친다는 소식에 학교에서 피신했다고 한다. 학교를 나오다 유시민을 만났는데 유시민은 학교에 남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그 일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가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시민을 남겨 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으로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나왔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든 역사에서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 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 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카타필라의 굉음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고초를 겪은 후 변칙 입대를 당했는데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며,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해 12월 무림사건이 터지자 이등병 유시민은 보안사에 끌려가 또다시 처절하게 당한다. 최전방에 배치된 그는 일체의 보직에서 차단당한 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기에 밤마다 열 시간이 넘게 철책 근무를 서고, 얼차려를 받다 터진 손은 동상에, 발에는 무좀이, 온몸에는 옴이 잔뜩 올랐다고 한다.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반공교육과 평생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프락치 공작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당시 그는 ‘전두환 정권을 거꾸러뜨릴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데 그뿐만 아니라 그 때 고통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라는 시구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던 시절과 목숨으로 싸웠던 청년들. 그들이 자유와 민주에 한이 맺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유시민은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한다.

그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을 때 “너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맞지?”라는 질문을 처음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내가 무슨 주의자이든 니가 뭔 상관인데. 난 니가 살인방화를 하지 않는 이상 무슨 주의자를 해쳐먹든 상관 안 할 테니 전두환 니네들도 내 주의에 신경 꺼 줘. 이렇게 맺힌 한이 ‘자유’를 향한 염원을 심장에 새겼을 것이다. 물론 같은 시대를 산 386 개혁세력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유시민이 이념, 좌파, 주체사상 등에 질시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좌든 우든 하여튼 이념이란 걸로 사람한테 올가미 씌우는 것에는 진절머리가 났을 거다. 보안사 분실에서 그 괴물딱지 같은 ‘이념’ 때문에 고문을 당하며.

그래서 그는 “나의 자유는 언제나 나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라는 경구를 되뇌며 발본색원, 일사불란을 혐오하고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신하는 사람이 됐다고 이 책은 전한다.

이 책 표지엔 “항소이유서에서 소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까지”라는 문구가 박혀있다. 그런데 ‘소셜’은 어디로 간 것일까. 유시민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셜’은 빼고 ‘리버럴’만 말하고 있다. 유시민 자신도 요사이 행보를 보면 오직 ‘리버럴’만 있는 것 같다. 유시민이 말하는 개혁도 ‘소셜’적 개혁이 아닌 ‘리버럴’적 개혁, 즉 ‘민주’에만 함몰된 것 아닌가?

요사이는 유시민 뿐만이 아니라 개혁진영 386 전체가 자유와 민주에 한이 맺혀 ‘리버럴’에 빠진 느낌이다. 우리는 ‘리버럴’한 권력을 겪어보지 못해서 ‘리버럴’이 진보인 것처럼 오인하는 경향이 있는데 ‘리버럴’은 명백히 보수우파의 가치다. ‘리버럴’이 진보로 받아들여지는 나라는 맛이 간 미국뿐이다. 그러니까 미국 사회가 그 모양 그 꼴이지.

리버럴이 의미 있기 위해선 앞에 반드시 ‘소셜’이 붙어야 한다. 리버럴에 소셜이 붙을 때, 그것이 바로 본래적인 의미의 ‘제3의 길’이다. 물론 최근엔 ‘제3의 길’이 신자유주의화와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소셜 리버럴’이 제3의 길이었다. 그것이 서유럽 복지사회의 이념이다.

소셜 리버럴은 독일 기민련과 국민정당으로 변신한 후의 사민당이 공유하는 이념이다. 추측컨대 유시민의 소셜 리버럴은 독일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모습을 본 청년의 심장에서 나온 것일 게다. 하지만 워낙 자유, 민주에 한이 맺혀서 요사이 부지불식간에 ‘자유’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유시민과 개혁세력은 아직까지 전두환 일당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80년대 멘탈리티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유시민이 한나라당 표를 뺏기 위해 일부러 ‘자유’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소셜 리버럴에서 소셜을 빼면 미국 공화당, 부시-라이스 오누이, 한나라당 등이 나온다. 소셜을 반만 남기면 미국 민주당이다.)

유시민은 노회찬 의원에게 민주노동당을 보면 꼭 2차 대전 전의 독일 사민당 같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게 국민정당으로 변모하기 전, 즉 리버럴은 없고 소셜만 있었을 때의 사민당이다. 노회찬 의원은 그 때 “당연하지”라고 자랑차게 대답했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리버럴’한 기초 위에 ‘소셜’한 해법이 가능... 유럽의 제3의 길도 그런 거고요. 그런데 민노당은 리버럴한 부분이 거의 없어요. 오직 소셜이라고 얘기해야 할 거예요. 그들과 우리는 그런 차이가 있어요... 집단적 문화 간의 차이예요.”라고 말하고 있다. 리버럴한 기초 위에 소셜한 해법을 얹은 게 바로 독일 기민련이 터 닦은 사회적 시장경제다.

그런데 최근 유시민은 ‘오로지’ 리버럴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다른 부분에서 “저는 한나라당 표를 뺏을 거예요”라고 하고 있는데 혹시 이 대목이 최근 유시민의 행보가 일견 보수우경화처럼 보이는 것을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아닐까?

한나라당 표를 뺏기 위해선 결국 한나라당을 찍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야하고, 그 얘기는 점점 영남-수구-기득권-보수층에게 가까이 가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지역구도를 깨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전두환을 때려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 한나라당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결국 ‘소셜 리버럴’에서 ‘소셜’을 사라지게 하고, 우로, 우로 방향타를 잡게 하는 동인일까.

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경쟁하는 구도는 최악의 구도(미국처럼 되는 구도)라고 보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소멸시키기 위해 우리당의 우경화를 일정정도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유시민 정도의 사람이 정말로 ‘리버럴’ 일변도로 빠져버린다면 안타깝다. 최근의 유시민은 위태위태하다. 난 그가 ‘리버럴’에서 다시 ‘소셜 리버럴’로 귀환하길 바란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복지사회의 국가 비젼을 그가 펼쳐 보여주길 바란다.

우리당 우경화 인정한다니까 실용파 편드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덧붙인다면, ‘우경화 - 좌경화’와 ‘실용 - 개혁’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경화해도 개혁은 얼마든지 한다. 사실 한국사회는 리버럴만 되도, 즉 미국처럼만 되도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는 찌그러져 주시고.

유시민은 이 책 속 과거 인터뷰에서 “불확실성에 배팅하는 배짱이 부족함”을 질타한다. 호남표 연연하지 말고 화끈하게 민주당 박차고 나오라는 주문이다. 유시민의 그런 인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우리당 새가슴 의원들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해 다시 안전빵 호남몰표를 계산하고 고건을 호명하는 지금, 유시민의 신념은 유의미하다.

또 대통령은 전체 국민의 대통령이므로 싸움 그만 해도 되게 우리당이 개혁적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는 유시민의 진단도 전적으로 유효하다. 대통령이 소총 들고 뛰쳐나가도록 상생실용질에 기둥 썩는 줄 모르는 우리당 주류는 얻어터져 싸다. 요즈음은 또, 대통령이 안 싸우니까 우리당 주류도 니나노판이다. 대통령이 상생실용한다고 정당까지 물렁해지면 정당이 왜 존재한단 말인가.

어쨌든 이 책은 ‘인물 탐구’란 제목에 값한다. 차력적 성실함에 바탕한 지승호의 인터뷰와 지식인들의 소개가 씨줄 날줄로 엮인 책에서 유시민이란 정치인이 입체적으로 구성된다. 술술 편하게 읽힌다는 점도 좋다. 개인적으론 저렴해보이는 종이질이 크게 마음에 든다. 난 빳빳한 하얀 종이에 그럴싸하게 양장 제본된 책만 보면 분통이 터지는 체질이라.

지승호의 인물 탐구 1이 유시민이라는 중도우파의 아이콘을 탐사했으니 탐구 2에선 중도좌파의 아이콘을 불러 세웠으면 좋겠다. 한국 정치지형에서 중도좌파의 아이콘이라, 누가 있을까. 글쎄, 노회찬 의원일까? 지승호가 찾아 주겠지.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기고

덧붙이는 글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기고

유시민을 만나다 - 항소이유서에서 소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까지, 지승호의 인물 탐구 1

지승호 지음,
북라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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