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으로 이 닦은 아내

아내의 건망증이 심해 졌어요

등록 2005.06.12 23:24수정 2005.06.1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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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은 6시부터 당직이라서 5시 30분경 집을 나서는데, 아내는 '시장에나 다녀와야 겠다'며 나를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아내의 손에는 작은 메모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흘깃 본 메모지에는 아들의 팬티와 양말을 비롯해 콩나물, 비누 등 사야할 품목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시장 갈 때 메모를 하지 않으면 빼먹고 안 사는 품목이 많아서 다시 시장에 가야 되거든요."

아내의 애잔한 미소에 나는 가슴이 아려옵니다.

오늘 점심 무렵에도 집안청소를 하다 베란다에 간 아내의 혼잣말이 한숨과 함께 들려 왔습니다.

"내가 참 못살겠다. 빗자루가 필요해서 왔다가 물뿌리개를 가져가서 다시 왔네. 요새 내가 왜 이리 정신이 없는지."

아내의 자책에 나는 안쓰러워 고개를 돌립니다.


"아침에는 이를 닦으려고 치약을 짰어요. 하얀색 튜브에 짜보니 내용물도 하얀 색이어서 생각 없이 칫솔질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맛이 하도 이상해서 다시 보았더니, 글쎄! 화장품이지 뭐예요. 입을 헹구고 나서 다시 이를 닦기 위해 치약을 보니, 감색튜브에 하늘색 용액이었어요."

아내는 40대에 접어든 몇 해 전부터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습니다. 얼마 전에는 주유소에서 신용카드로 기름을 넣고 분명히 아내가 신용카드를 챙겼습니다. 신용카드를 돌려달라고 하자 펄쩍 뛰면서 오리발입니다. 내가 아내의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찾아내자 아내는 건망증 탓을 하면서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나 신용카드사건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카드가 보이지 않으면 아내는 우선 은행에 분실신고를 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신용카드가 나타나고 아내가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면 그만입니다. 딸아이도 아내를 닮았는지 숙제나 실내화, 심지어 체육복을 챙겨가지 않은 적도 많습니다.

또 우리부부는 외출하다가 지하차고에서 차를 탈 때면 아내는 툭 한마디를 던집니다.

"아! 가스 안 잠그고 그냥 왔다. 당신, 혹시 확인했어요?"

아내는 부리나케 다시 집으로 향합니다. 물론 단 한번도 가스가 켜진 채로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내에게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재작년에 직장선배인 박 선생님 가족과 여름휴가를 갔는데, 6시간을 걸려 휴가지에 도착하자마자 '선풍기를 켠 채로 나왔다며 집에 가겠다'고 합니다. 겨우 진정을 시켜서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해서 확인을 부탁했습니다. 물론 선풍기는 얌전하게 있었지요.

아내는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출입문에는 '가스 점검문'을 붙여 놓았습니다. 위에 보이는 것은 책 대여회사에서 대여만료일에 책을 내놓지 않는 아주머니들의 건망증 때문에 붙여 놓은 메모지입니다.

아주머니, 가스점검 하셨습니까?
아주머니, 가스점검 하셨습니까?한성수
아내의 건망증 사례는 이밖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휴대폰이 없어져서 한참을 찾다 못 찾았는데 며칠 뒤에 찾았습니다. 아내가 반찬그릇을 정리하다가 그릇과 함께 냉장고에다 휴대폰을 함께 넣은 것입니다.

아내는 어떤 아주머니는 명태찌개를 끓이다가 국에다 휴대폰을 넣고 '휴대폰 찌개'를 끓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씁쓸하게 웃습니다.

망각증상이 심한 것을 건망증이라고 하는데, 특히 건망증이 가정주부에게 많은 이유는 반복되는 가사일로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녀들의 교육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건망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마누라! 치매와 건망증의 차이가 볼일을 보고 난 뒤 지퍼를 올리지 않는 것은 건망증이고, 지퍼를 내리지 않고 볼일을 보면 치매랍디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잊을 건 좀 잊고 삽시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아내에게 우스갯 소리를 합니다. 아내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당직을 위해 차를 타고 떠나는 나에게 손을 흔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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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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