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어린 아이가 대견하구나. 내가 총명한 제자를 얻었어.”
군기창 창장 박 서방이 수항을 칭찬했다.
“저야말로 큰 스승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창장님께선 양인들의 화약제조법을 아신다고…. 저 화약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옵니까?”
“그래. 지금으로선 나와 화약제조공 몇 만이 방법을 알 뿐이지만 머지않아 배우게 될 날이 있을 게다.”
“수항아, 네가 와순(瓦珣: Watson)제조공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
“아닙니다. 아직 뵈온 적은 없사옵고 그저 야쟁이 아재들로부터 말씀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조수 도미(刀美: Tom)에 대해서도?”
“오자귀(五子鬼: 흑인)라 들었습니다.”
“앞으론 오자귀란 말 쓰지 말거라. 그도 다 같은 사람이다. 피부색이 다르다하여 막 대하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예, 창장님.”
“조만간 그들을 한 번 보자꾸나. 총포 제조술이나 화약제조술이야 미리견국(미국)에서 이미 익힐 만치 익혔다고 생각을 했건만 막상 여기 돌아와 보니 그들이 아니었으면 이루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그네들이 따라 나서 준 것이 너무도 큰 힘이 되었지.”
미국인 총기제조기술자 왓슨과 그의 흑인 조수 톰에 관해 제법 많은 언질을 주고 그들을 만나보자는 말까지 건넨 것은 수항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왓슨과 톰은 벌써 4년 넘는 세월을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군기창 내에서만 지내는 이들이었다. 굳이 마을이나 광산으로의 출타를 억제한 것은 아니었으나 양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입장이나 대동계의 입장이나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해 주는 것이었다.
“섬돌아재는 그 양인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여기 조선까지 따라나선 사람들이라 하더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꼭 그리 볼일만도 못 된다. 한 번 들어온 후론 우리의 허락 없이 나설 수 없는 길인데 꼭 돈 때문에 이런 길을 택했다 볼 수 있겠느냐. 백인과 흑인이 그리 흉허물 없이 지내는 걸 보면 예사 사람들은 아닌 것도 같고.”
매달 한 사람 앞에 금 쉰 돈이라는 거액의 보수는 목숨을 내놓고 타국에 따라나설 만한 가치가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같이 지내며 보여준 그들의 적극성은 박 서방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보는 것이야 언제든 기회가 있을 터이고 오늘 당장은 저 화약들을 탄환제조소로 좀 옮겨놓지 않겠니? 저들을 도와서 말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싶었는지 화약 포대를 지게에 싣고 있는 무리들을 가리키며 박 서방이 말했다.
“예.”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수항이 무리 쪽으로 달려갔다.
탄환제조소 안은 온통 아낙네들로 북적 거렸다. 흙벽에 초가를 얹은 길쭉한 건물이라 안은 후끈후끈했다. 몇몇 아낙은 아예 치마를 허벅지 위까지 걷어놓고 질펀하게 앉아서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무더웠지만 길게 탁자를 만들어 붙여놓고 마주 앉아 쉴 새 없이 놀리는 아낙들의 손길이 매우 분주했다.
“자, 이렇게 해보세요.”
바쁜 동작이 오가는 가운데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서른이 될까 말까한 처자의 목소리였다. 처자의 동작에 따라 마주 앉은 아낙이 봉을 넣고 풀을 먹이며 한지를 말아 감았다.
“그렇지요. 꼭 여덟 번을 감아야 되요. 덜 되면 헐고, 더 되면 두꺼워 약실에 맞지 않습니다.”
한 자 길이의 한지가 말리자 봉을 빼고 옆으로 밀어 놓았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걷는 사람이 따로 있어 가져다 그늘에 말린다. 그리고 하루쯤 잘 마른 종이말이에 돼지기름을 바르면 단단한 방수포 탄피가 된다. 이것이 다시 옆 작업대로 보내지면 날이 여럿인 작두에 넣어져 한 치 엿 푼 간격으로 잘린다. 이것들이 다시 옆 작업대로 옮겨지고 거기에선 다시 배달되어온 뇌홍을 넣은 뇌관을 탄피에 조립하는 공정만 행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정네들이 일하는 옆 건물에서 탄피 안에 화약을 채우고 원추형 탄두를 끼운 후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일이 철저히 분업화 되어 있고, 표준화 되어서 각자가 규격에 맞게 처리해 주지 않으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수가 있어요.”
“예.”
조심스럽게 한지를 말면서 아낙이 대답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듯 쑥쑥 말아 눈 깜짝할 새에 끝내는 다른 아낙들에 비하면 아직 굼뜨기 한량없지만 조금씩 손에 익어가는 눈치였다.
“바깥 분은 한 동안 못 뵙게 되었으니 생각이 많이 나시겠어요.”
처자가 아낙에게 다감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뭘요. 홀 시어머님과 자식들 건사하다 보면 그런 생각 들 짬도 없는데요. 뭘.”
아낙은 생김과 다르게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말은 그리하면서도 눈썹은 떨렸다.
“바깥 분 함자가 어찌 된다 하였지요?”
“판개라 해요. 오판개.”
“아, 그 동생분하고 해주에서 같이 왔다던?”
둘 사이의 대화에 갑자기 옆의 아낙이 끼어들었다. 사십은 넘어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아낙이었다.
“우리 큰 아들도 이번 모집에 응시해 합격을 하였는데 용력이 출중하고 성품이 바른 형제분들이 있다 하여서 그 이름을 들었다우.”
“예, 오또판개라는 분이 저희 시동생 되시어요.”
아낙은 해주에서 광산으로 들어온 판개의 처였다.
“그래요. 그 양반들이 맞다니까. 큰 아들이 엊그제 합숙인가 뭔가가 끝났다며 집엘 들렀다우. 어딘가에 가서 조련을 하고 몇 달 뒤에나 볼 수 있다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서방 잃고 그거 하나 의지가 되나 싶더니 그래도 장남이라고 곁에 없으니 훵합디다. 그래도 임자는 엊그제 서방을 봤으니 얼마나 좋아. 한참을 굶었다 만났으니 구들장이 성하기나 했는지 몰라.”
나이 든 아낙이 제법 활달하게 육담을 뱉었다. 판개 처의 볼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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