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는 하늘 아래> 그리고 자장면

"너희들은 한 부모를 가진 이 세상에 오직 둘 뿐인 남매"

등록 2005.06.21 23:57수정 2005.06.2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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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단발머리 중학생이던 27년 전 그때. 학교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집으로 향해야 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셔야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저녁밥 하고 또 시간 맞춰 연탄불 갈고 거기다 초등학생이었던 네 살 아래 남동생의 숙제까지 챙겨야 했다. 나는 그런 하루하루가 짜증이 났다.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공원이며 빵집으로 몰려다니며 수다도 떨고 싶었다. 그러나 하루라도 집안일을 거르는 날에는, 아니 내 나름대로 그렇게 열심히 집안일을 해놓았어도 어머니는 늘 못마땅하셨던지, 내 귀는 언제나 어머니의 잔소리로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냉혹하리만치 가혹하셨던 어머니께서 남동생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동생이 미처 숙제를 다 못했어도 동생의 숙제를 챙겨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꾸지람 하셨고 동생이 밖에 나가 놀다 어딘가 조그만 상처가 생겨도 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꾸지람 하셨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동생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집안 일 때문에, 또 동생 때문에,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 늘 동생만 감싸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 때문에 스트레스를 푸는 돌파구를 동생으로 택한 것이다. 끊임없이 동생에게 시비를 걸었고, 잔소리를 하였고, 어떤 때는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아 혹이 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결국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아마도 그날이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마침 친구 생일이라 잠깐만 놀다온다는 생각으로 친구 집에 가게 되었다. 친구들과 모여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불현듯 스친 동생 생각에 쏜살같이 내달렸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부엌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의 낡은 운동화가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일찍 오신 건가.'


순간 일찍 오신 어머니가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늦은 것에 대한 꾸지람이 두렵기도 했다. 엇갈린 감정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겉으로 애써 반가움을 가장하며 "엄마"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나는 연거푸 '엄마'하고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무겁고 두려운 냉기가 나를 덮쳤다. 방 한쪽에 누운 동생의 팔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어머니의 두 눈엔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책가방을 손에서 내려놓지도 못한 채 나는 재빠르게 방안의 사태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왠지 무거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계신 어머니가 무척 두려웠다.

잠시 후 끝내 그 어떤 한 마디 말씀도 없이 어머니께서는 밖으로 나가 버리셨다. 얼른 동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배가 고파서 라면 끓여 먹다 냄비를 엎어서 팔을 데었어. 그래서 병원에 갔다 왔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토요일이니 일찍 집으로 와서 동생의 점심을 챙겨 주었어야 했는데 친구들과 수다 떨며 노느라 동생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셨을 텐데. 얼마나 혼을 내실까.'

그 와중에도 나는 동생에 대한 걱정보다는 어머니께 혼날 것을 우려한 참 철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당연히 불같은 꾸지람을 하시고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질을 하셔야 하건만 어머니께서는 저녁밥을 하시는 내내 그리고 저녁밥을 먹는 내내, 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더욱 두려웠다. 차라리 내 종아리에 피가 나는 게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날. 그러니까 일요일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어디 갈 데가 있으니까 밥 먹고 어서 나갈 준비해."

다른 때 같으면 괜히 들떠서 오두방정을 떨었겠지만 낮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말씀이 내 입을 막아버렸다.

버스 정류장을 향하여 걷는 길엔 초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들은 평화롭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전날 일에 대하여 그때까지도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나는 어머니의 그 침묵이 두렵기만 했다.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극장이었다. 환하던 극장 안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는 몹시 궁금했다. 왜 어머니께서 뜬금없이 나를 극장에 데려 오신건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그 궁금증이 서서히 매듭을 풀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영화속 한 장면. 영화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잡지에 실린 사진을 디카로 찍어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속 한 장면. 영화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잡지에 실린 사진을 디카로 찍어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속 한 장면
영화속 한 장면
'비행장 부근의 소금 채취장이 영출이 아버지의 일터였다. 영출이 아버지는 날마다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의 소음만 들으면 6·25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나 하늘에 대고 총질을 해댔다. 결국 영출이 아버지는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영출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대신해 살림을 꾸려가게 되지만 영출의 막내 동생을 낳고 결국 죽고 만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하루하루 술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영출은 학교를 그만 두고 소금 채취장에서 일을 하며 가장 노릇을 한다.

영출의 동생 영식은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로 물바가지와 깡통을 머리에 쓰고 막대기로 총을 대신하며 캄캄해질 때까지 동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하느라 어린 동생을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영출은 어떤 날은 어린 동생을 등에 들러업고 소금채취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술로 살던 영출의 아버지는 정신병이 악화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보다 못한 마을사람들은 영출이를 비롯하여 어린 세 형제를 고아원으로, 또 양자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영출은 동생들이 굶지 않으려면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때까지 만이라도 마을 어른들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하고 동생과 함께 어른들을 따라 나선다.

그러나 기차를 타는 순간 남겨놓은 막내 동생 생각에 영출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기차에서 뛰어 내린다. 마찬가지로 영출의 동생 영식이도 버스에 오르려다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결국 세 형제는 다시 모였고 마을사람들과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게 된다.'


그 영화는 바로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그때가. 나보다 훨씬 어린 영출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소금채취장에서 일하는 게 불쌍해서 울고, 지독하게도 개구쟁이 짓을 해 형을 무던히도 속 썩이던 영식이가 양자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도로 내려 집으로 달려가는 길에 형을 부르며 울부짖던 대목에선 감정이 북받쳐 아예 통곡을 해버렸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슬피 울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바로 내 동생 때문이었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어제. 동생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리고 팔에 그 뜨거운 라면을 엎었을 때 얼마나 뜨거웠을까.'

동생에 대한 미안함. 바로 그 뼈저린 반성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이 환하게 밝아졌을 때 극장 안은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로 들썩였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잊은 채 연신 눈물을 훔쳐 내고 있었다. 물론 우리 세 식구도 마찬가지였다.

극장을 나와 어머니께서는 우리 남매를 허름한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셨고, 자장면을 사주셨다.

나는 영화에 대한 감동으로 또 동생에 대한 반성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장면을 먹었다. 어머니는 자장면을 드시다 말고 우리 남매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에 항상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또 이 세상엔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한 가지. 바로 가족이라는 거. 항상 가슴에 새기도록 해."

그날 이후. 동생이 서른여덟이 된 지금까지 우리 남매는 사소한 말다툼 한번 하지 않았다. 가끔 우리 올케는 그런 말을 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남매'라고. 특히 재작년 아버지께서 사고를 당하셨을 때 동생은 내 마음과 똑같은 말을 해 나를 놀라게 했다.

"누나가 있어서 참 든든해."

그건 바로 내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도 동생이 있어서 참 많이 든든했기에.

돌이켜 보면 그때 어머니께서는 우리 남매에게 가족이란 것과 남매라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해 꽤 큰 투자를 하셨던 것 같다. 콩나물 값 백 원을 깎기 위해 늘 채소전 아줌마와 실랑이를 하시던 분이 영화에 자장면까지 사주셨으니 말이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우리 남매에게 가족이란 것과 남매라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해 꽤 큰 투자를 하셨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우리 남매에게 가족이란 것과 남매라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해 꽤 큰 투자를 하셨다.김정혜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믿으셨을 것이다. 그날 쓴 돈의 몇 배 아니 몇 백배 더 값진 것을 우리 남매가 깨달았을 것이라는 걸. 요즘도 어머니께서는 그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너희들은 한 부모를 가진 이 세상에 오로지 둘 뿐인 남매들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죽고 난 후에도 항상 서로 의지하고 항상 보듬어 주며 살아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족이란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특히 요즘같이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돈 때문에 형제 간에 칼부림을 마다 않는 반인륜적인 사건들을 접할 때면 우리가 정말 소중한 것들을 무심히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면에서 먼 옛날. 어머니께서 우리 남매에게 보여주신 그 영화는 이 세상에서 정녕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일깨워 주었고 내가 이 세상을 사는데 두고두고 좋은 지침서가 되었다. 내게 그런 소중한 경험을 제공해주신 어머니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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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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