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단발머리 중학생이던 27년 전 그때. 학교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집으로 향해야 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셔야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저녁밥 하고 또 시간 맞춰 연탄불 갈고 거기다 초등학생이었던 네 살 아래 남동생의 숙제까지 챙겨야 했다. 나는 그런 하루하루가 짜증이 났다.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공원이며 빵집으로 몰려다니며 수다도 떨고 싶었다. 그러나 하루라도 집안일을 거르는 날에는, 아니 내 나름대로 그렇게 열심히 집안일을 해놓았어도 어머니는 늘 못마땅하셨던지, 내 귀는 언제나 어머니의 잔소리로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냉혹하리만치 가혹하셨던 어머니께서 남동생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동생이 미처 숙제를 다 못했어도 동생의 숙제를 챙겨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꾸지람 하셨고 동생이 밖에 나가 놀다 어딘가 조그만 상처가 생겨도 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꾸지람 하셨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동생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집안 일 때문에, 또 동생 때문에,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 늘 동생만 감싸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 때문에 스트레스를 푸는 돌파구를 동생으로 택한 것이다. 끊임없이 동생에게 시비를 걸었고, 잔소리를 하였고, 어떤 때는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아 혹이 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결국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아마도 그날이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마침 친구 생일이라 잠깐만 놀다온다는 생각으로 친구 집에 가게 되었다. 친구들과 모여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불현듯 스친 동생 생각에 쏜살같이 내달렸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부엌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의 낡은 운동화가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일찍 오신 건가.'
순간 일찍 오신 어머니가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늦은 것에 대한 꾸지람이 두렵기도 했다. 엇갈린 감정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겉으로 애써 반가움을 가장하며 "엄마"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나는 연거푸 '엄마'하고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무겁고 두려운 냉기가 나를 덮쳤다. 방 한쪽에 누운 동생의 팔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어머니의 두 눈엔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책가방을 손에서 내려놓지도 못한 채 나는 재빠르게 방안의 사태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왠지 무거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계신 어머니가 무척 두려웠다.
잠시 후 끝내 그 어떤 한 마디 말씀도 없이 어머니께서는 밖으로 나가 버리셨다. 얼른 동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배가 고파서 라면 끓여 먹다 냄비를 엎어서 팔을 데었어. 그래서 병원에 갔다 왔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토요일이니 일찍 집으로 와서 동생의 점심을 챙겨 주었어야 했는데 친구들과 수다 떨며 노느라 동생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셨을 텐데. 얼마나 혼을 내실까.'
그 와중에도 나는 동생에 대한 걱정보다는 어머니께 혼날 것을 우려한 참 철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당연히 불같은 꾸지람을 하시고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질을 하셔야 하건만 어머니께서는 저녁밥을 하시는 내내 그리고 저녁밥을 먹는 내내, 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더욱 두려웠다. 차라리 내 종아리에 피가 나는 게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날. 그러니까 일요일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어디 갈 데가 있으니까 밥 먹고 어서 나갈 준비해."
다른 때 같으면 괜히 들떠서 오두방정을 떨었겠지만 낮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말씀이 내 입을 막아버렸다.
버스 정류장을 향하여 걷는 길엔 초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들은 평화롭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전날 일에 대하여 그때까지도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나는 어머니의 그 침묵이 두렵기만 했다.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극장이었다. 환하던 극장 안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는 몹시 궁금했다. 왜 어머니께서 뜬금없이 나를 극장에 데려 오신건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그 궁금증이 서서히 매듭을 풀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