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순간에 운명적 역할 해야 한다"

[인터뷰]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평화 위해 전쟁 연구했다"

등록 2005.06.24 00:00수정 2005.06.2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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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5년째를 맞는다. 남북한은 전쟁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채, 52년 동안 전쟁을 끝낸 상태가 아니라 멈춘 상태로 살아왔다. 그리고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물론 체념할 필요는 없고 체념해서도 안된다.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닐 뿐더러,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기와 기회를 정확히 깨달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는 전쟁과 평화라는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비껴갈 수 없고, 분단과 전쟁의 역사적 쌍생아라고 할 수 있는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종속적인 한·미동맹을 바로잡아야 하며, '냉전의 섬'에서 '동북아 평화의 중심'으로 거듭나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평화를 위해 전쟁 연구를 시작했다"며 전쟁과 평화는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등의 문제에 대해 천착해오면서 한국전쟁 3부작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를 만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의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 대학원 교수. 그의 한국전쟁 연구는 "학문 주권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념비적인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 대학원 교수. 그의 한국전쟁 연구는 "학문 주권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념비적인 것이다.오마이뉴스 조경국
박명림 교수가 내년 출간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 책은 '한국전쟁 발발과 기원Ⅰ·Ⅱ'(1부) 및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부)에 이은 완결판이다. 그의 한국전쟁 연구는 "학문 주권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념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마지막 3부에서 한국전쟁과 이에 대한 정권의 '해석의 독점'이 얼마나 한국인들의 정신과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바람직한 청산 방향과 민주주의와 평화와 인권과 통일 실현 방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는 박 교수가 3부작의 책 제목을 '평화의 조건'으로 정한 까닭이기도 하다.

박 교수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것은 가장 비참한 전쟁을 겪고도 "왜 우리는 50년이 지나도록 평화체제를 만들지 못했는가"라는 의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평화가 1,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시련을 딛고 그 비극이 제공한 반성과 지혜의 산물이었음에 비춰볼 때, 반세기 전에 가장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전쟁을 치르고도 50년 후에 또다시 전쟁 위기를 막아야 하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다음은 박 교수와의 인터뷰 요지를 정리한 것이다.

"왜 우리는 가장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또 전쟁 위기를 막아야 하는가"


-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로서 전쟁 발발 55주년을 맞이하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
"한국전쟁을 연구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그 영향의 압도성이라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 보여주듯 대개 전쟁은 50년 정도가 지나면 전쟁의 직접적 결과나 영향은 극복의 과정에 놓이게 되는데 비해 한국전쟁은 아직도 압도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전쟁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의 크기가 놀랍다.

두번째로 놀라운 점은 지난 세기 가장 처참한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평화체제를 건설하지 못했다는 점, 즉 우리의 지혜와 이성의 한계가 놀라울 따름이다.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전쟁을 치렀던 상처를 반복하지 말자고 했지만, 우리는 그런 큰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를 극복을 못했다는 점이 애석하기만 하다."

- 왜 우리는 전후 50년이 넘도록 평화체제를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첫째 이유는 53년 체제, 즉 정전체제 자체의 불안정성에 있다. 전후 처리 자체가 종전이 아니라 '정전'이라는 잠정 타협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평화체제 구축이 지연되고 있는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유는 전쟁 자체의 폭력성에 있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엄청난 무기와 병력이 투입되었고, 이에 따라 엄청난 폭력을 수반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폭력성은 지금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의 규모는 약 2백만에 달하는데,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력의 밀집 현상이다.

끝으로 정전체제의 국제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53년체제는 국제체제의 성격을 띄고 있다.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의 지역분단체제는 당시의 양자 관계에 머물러 있고, 동아시아 국가간의 성격이 집단안보 기구의 성격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미국과도 다 양자관계였고 동아시아 내에서도 양자관계였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이익이나 관계가 제기되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53년체제의 불안정성, 폭력성, 국제성은 평화체제 구축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와 같은 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들이 강하게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이 구조에 파열음을 낸 사람은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6·15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기념하는 최초의 사례"

- 예전부터 6·25를 기념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는데.
"쉽게 말해 6·25는 적대와 증오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6·25는 한국정부나 모든 한국사회의 인식의 출발점과도 같았다. 나는 이러한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평화를 생각하고 좀 더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종전'을 생각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6·25를 기념해온 우리의 정신사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던져준 것이 바로 6·15 공동선언이다. 6·15 선언의 정신은 '다시는 6·25로 돌아가지 말고 다시는 증오의 담론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6·15 선언을 통해 6·25의 담론을 자연스럽게 극복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6·15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도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발전과 민주화 등에 있어서는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국제관계나 대외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6·15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형성이었다고 본다.

지난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물론 6·15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것은 앞으로도 공동의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기반이라는 점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를 통해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에게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울러 남북한 모두에게 6·15에 담긴 평화 공존 정신을 깨뜨리려고 하는 시도들도 제약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남한 민주화의 반영이자 성과이기도 하다."

-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리면서 "이제 한반도에서 더이상의 전쟁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6·15 선언 5년이 지난 오늘 평화에 대한 기대감보다 전쟁 위기에 대한 우려가 더 큰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보는지.
"6·15 공동선언은 평화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를 확인시켜주고 우리의 능력을 부분적으로 보여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분단체제의 근본적인 파열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6·15가 53년 체제와 94년 체제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두 체제가 갖고 있는 공통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미국의 과도한 직접 개입이고, 둘째는 북한과 미국의 직접 거래이며, 셋째는 남한의 철저한 배제이다.

이와 같은 두 체제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공고화될 수 없다. 6·15 이후 부시 행정부라는 예외적인 정권의 등장도 한반도 위기의 큰 원인이겠지만, 우리가 이전부터 평화체제를 공고히 하고 안정화시켰다면 오늘날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양자주의를 넘어 다자주의로"

- 양자주의와 다자주의, 그리고 동북아 평화를 논의할 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이는 미국이 안보 보장자와 안보 위협자로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의 양자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적대관계나 갈등관계에 있는 북한과 중국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안보 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동북아 국제질서가 다자주의로 가지 못하고 양자주의에 얽매여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냉전시대 이전에도 미국은 일본과 영국과의 관계를 통해 중국을 압박했다. 냉전 시대에 이것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소련이라는 세계 냉전의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붕괴되자 미국은 또 다시 중국이라는 지역적 강국을 압박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냉전시대보다 훨씬 더 강화시키고 있다.

6·15는 이러한 양자관계에 막대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한·미동맹과 북·미 적대관계는 지속되어왔지만,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양자관계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적대관계에 파열음을 내서 한·미관계와 북·미관계를 재조정하려고 했고, 다자주의를 도입하려 했다. 이러한 노선은 노무현 정부에게도 계승되어 한반도 적대체제의 핵심인 북·미관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오마이뉴스 조경국
- 이 과정에서 6월 17일 정동영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의 면담 의미는 큰 것 같은데.
"3차 6자회담까지는 중국의 역할이 중요했었지만 3차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중국은 반발짝 정도 뒤로 물러섰다. 미국의 의도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면담의 의미는 크다.

이번 면담을 통해 북핵 문제에 있어서 남한의 이니셔티브를 인식하게 되고 이를 분담하게 할 수 있다는 인식을 나누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 이를 정교화해서 북핵 해결의 계기와 평화체제 구축의 계기를 만드는데 남한의 비중을 높여야 할 것이다. 남한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시기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운명적 순간에 운명적 역할'을 해야 할 때다. 대파국과 대타협의 기로에서 대파국은 대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대타협은 공고한 평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위기의 크기는 파국을 맞이했을 때 그 피해의 크기를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위기를 해결했을 때 안정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곧 기회의 크기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제대로 간파하고 또 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혜의 핵심에는 북핵 위기 해소와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의 건설을 반드시 함께 사고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불안한 상태에서 동북아가 안전해질 수 없고, 동북아의 지역냉전체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반도 평화체제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운명적 순간에 운명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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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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