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권위를 만드는 건 신이 아닌 인간

[어머니와 함께 한 3박 4일 북경여행2] 천단공원

등록 2005.06.30 11:25수정 2005.06.3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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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식의 표상 천제

하늘에 제를 올린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늘에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인 동시에 우리는 천제(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일종의 선민의식의 선포이자 특권이었다.


고대 우리 나라가 제천의식을 통해 민족간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천제의 아들이라는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행위는 단순한 제례 의미 외에도 황제의 권위 부여와 황권 유지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궁궐 안 주지육림에 파묻혀 정신없이 흥청망청하던 황제도 천제를 지낼 때가 되면 제사를 지낼 때까지 이곳 천단공원 안에서 얌전히 금식, 금욕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았을까. 명나라 영락제 때 세워져 청의 건륭제(1752년)에 개축되었다는 천단공원은 황제가 매년 하늘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곳이다.

자금성과 같은 시기(1420년)에 세워졌지만 그 규모는 무려 자금성의 4배에 달할 만큼 크다. 하기야 이곳은 하늘과 인간이 교감을 하는 중요한 장소이니 규모의 장대함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심성상 인간이 사는 궁궐보다는 무조건 커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그러나 규모가 크다는 것은 여행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 할 거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장랑의 중국인들

a 천단공원 장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천단공원 장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 김정은

어머니를 모시고 온 터라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일종의 회랑인 장랑(長廊)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중국사람들이 보인다. 남이야 듣던 말던 자기의 흥취에 못이겨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단으로 우루루 모여 떠들썩하게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로 악기 연주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좁은 공간을 비집고 기어코 중국식 제기차기나 마작과 같은 잡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a 장랑에서 제기를 차는 중국인들

장랑에서 제기를 차는 중국인들 ⓒ 김정은

분위기는 예외없이 떠들썩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명 한 명의 행동들이 모두 제각각이다. 이처럼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 휩쓸리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가 될 수 있는 그네들의 모습을 신기해 하다보니 문득 이러한 이들의 특성이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이 거대한 대륙을 지켜온 이름없는 중국인들의 삶의 노하우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년전은 현재 공사중


a 기년전 앞으로 가는 3개의 대리석 길 중앙의 길은 신도라 해서 황제가 밟을 수 없었다.

기년전 앞으로 가는 3개의 대리석 길 중앙의 길은 신도라 해서 황제가 밟을 수 없었다. ⓒ 김정은

이들을 지나 걷다보니 저만치에서 천자가 하늘에 1년 한 해의 풍년과 태평안민을 기원하는 곳인 기년전(祈年殿)의 원추형태의 청기와가 슬며시 보이기 시작했다. 기년전의 양 옆에는 역대 제천의식의 역사를 담은 서배전(西配殿)과 제천의식 때 사용되었던 악기들이 진열된 동배전(西配殿)이 있지만, 현재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어 유감스럽게도 출입통제 중이었다.

기년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흰 대리석으로 된 360여m의 단폐교(丹陛橋)에 올라 기년전까지 이어지는 3개의 대리석 길을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3개의 대리석 길 중 중앙길은 오로지 신만이 지나간다는 신도이므로, 무소불위의 황제라 해도 이곳에서만은 중앙길을 밟지 못하고 좌측통행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황제가 자기 구역이라 할 수 있는 자금성의 기와에 금칠도 도배를 한다하더라도 이곳 천단에서만은 그럴 수 없다. 바로 신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천단공원 내의 원추형 건물들의 기와가 금색이 아닌 모두 청기와인 이유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황제가 신에게 겸손한 자세를 보이기 위해서란다.

이처럼 엄숙한 곳이지만 그 옛날 황제조차 감히 밟지 못했던 신도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관광객들의 수많은 발자국에 이미 점령 당한 상태이다. 신권의 추락일까? 황권의 추락인가? 물론 천단의 존재는 바로 황권의 상징이니 황권의 추락이라는 것이 더 적합해보인다.

a 회음벽

회음벽 ⓒ 김정은

다음에 도착한 건물은 제반 제천의식을 준비하고 하늘에 바람과 구름 해와 달 등 자연신의 위패와 역대 황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황궁우(皇穹宇)이다. 비록 기년전의 규모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한 형태의 원추형태의 청기와 건물이라 출입통제된 기년전의 아쉬움을 약간은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황궁우에서 유명한 곳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을 에워싼 담이다.

a 황궁우 전경

황궁우 전경 ⓒ 김정은

황제의 기원이 만백성을 휘돌아 하늘에 전달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회음벽(回音壁)이라 명명된 이 벽은 실제 조용한 아침에 왼쪽 벽에서 말한 소리를 반대편 쪽에서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곳을 다녀간 여행객 중 회음벽의 비밀을 체험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왁자지껄한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서 소리의 공명을 실험해본다는 자체가 넌센스일테니 말이다.

a 원구단

원구단 ⓒ 김정은

회음벽의 경우처럼 제 할 일을 잃어버린 채 여행객의 사진 촬영물로 전락한 곳이 또 한 곳 있다. 바로 황제가 제천 행사를 거행하던 원구단(圓丘壇) 정 중앙에 놓인 천심석이라는 동그란 대리석이다. 이 천심석의 용도는 일종의 마이크로서 이곳에서 말하면 황제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고. 지금은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다투듯이 경쟁하는 관광객 등쌀에 제 할 일을 잃어버린 채 기념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원구단과 대한제국

황궁우를 지나 원구단에 오르기 위해서는 대리석으로 만든 3층의 원형계단을 올라가는데, 이곳은 원시제천의식을 계승하여 황제와 하늘이 아무런 장애 없이 노천에서 대화할 수 있도록 벽도, 기둥도, 지붕도 없다. 이곳의 돌의 개수가 황제를 의미하는 수인 9의 배수로 철저히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문득 외세의 침략에 허물어져가는 구한 말, 망해 가는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칭제건원 하며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했던 우리 나라 원구단의 존재가 생각났다.

광무 원년 시월 십이 일은 조선사기에서 몇만 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더니… (중략)… 이달 십이 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는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 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중략)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오. - <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고종이 원구단을 지은 이유는 바로 망해가는 왕권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폐지 되었던 민족 고유 전통인 제천의식을 부활시킴으로써 민족간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고 국권과 왕권을 보존하려고 했던 고종의 생각은 씁쓸하게도 우리들 기억 속에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기억될 뿐이다.

실제 우리 나라 원구단 또한 망한 나라의 전철을 밟아 1913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다음해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어 버렸다. 현재는 조선호텔 내에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그 당시의 씁쓸한 과거를 기억나게 할 뿐이다.

자존(自存)이라는 것은 스스로 지킬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이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을 짓는다고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당시 고종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했던 역사적인 수순이었을까? 황권이라는 것, 국권이라는 것 또한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 사이 어느새 다음 여정을 기다리는 버스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어머니와 함께 한 3박 4일 북경여행 2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어머니와 함께 한 3박 4일 북경여행 2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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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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