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밖에? 너 술 좀 마셔야겠구나"

80년대의 대학 앞 술집과 2005년의 그 곳

등록 2005.07.08 00:00수정 2005.07.0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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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사 어때요?"
"야, 말도 마라. 죽을 맛이다. 메뉴판에 술 안주보다 식사가 더 많은 거 보면 모르냐? 요즘 애들이 너 먹던 술의 10분의 1만 마셔도 소원이 없겠다."

두어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이런저런 모임 덕에 졸업한 학교를 찾게 된다. 그러면 나는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단골집에 들러 형님 아우 하는 사장님과 안부를 나눈다. 그때마다 장사가 너무 안된다는 주인 형님의 넋두리가 돌아온다.


"너 먹던 술의 10분의 1만 마셨으면..."

대학 축제의 밤을 밝히고 있는 주점.
대학 축제의 밤을 밝히고 있는 주점.손봉균
처음에는 허풍이 약간 섞였을 거라고 웃어 넘겼지만 가게에 앉아서 손님들이 오가는 걸 지켜 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한 테이블 사람 수가 다섯을 넘는 경우도 드물고 열 명 남짓한 단체손님(!)이 와도 저녁거리를 시킬 뿐이었다. 간혹 거기에 술이 더해지긴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목만 축이는 거다. 그렇게 밍숭맹숭하게 밥만 먹다가 과외다 학원이다 금세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매상도 매상이지만 술집하는 재미가 없다고 했다.

물론 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하지만 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하다. '계급장 떼고 넥타이 풀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 형님이 보기에는 요즘 대학생들 영 맹탕이라는 거다.

"개강 파티나 종강 파티 때는 그래도 술을 좀 마시지 않나요?"

대학 시절 선·후배가 어울려 왁자지껄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물어 보지만 대답이 영 시원찮다. 오히려 떼로 술을 마시자고, 오늘은 한번 밤새 마셔 보자고 꼬시는 사람이 바보 되기 십상이라고 한다. 하긴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후배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요즘 애들 술 안 마셔요. 저도 선배지만 예전 같이 술 취해서 다니면 손가락질 받는다니까요."
"형이나 만나니까 마시는 거지. 안 그러면 우리도 마실 일이 없어요. 물론 술 안 먹는 게 좋긴 하지만 선·후배 간에 정이 떨어지니까 아쉽긴 해요. 가끔은 예전이 그립기도 한데…."

꼭 술을 많이 마셔야 사이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술 때문에 웬수가 된 사이도 익히 봐왔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잘 안 풀리는 연애와 펑크 난 학점, 불안한 미래를 안주 삼아 서로의 맘을 열어 보이는 것도 꽤 짜릿짜릿한 일이다. 왜 그 짜릿함을 모르는 걸까?


"삐 마이나 밖에(!) 못 받았다고?"

"이제 방학이네. 뭐 할 거니?"
"뭐하긴요. 계절학기 들어야지요."

후배의 대답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내게 계절학기는 소위 '빵꾸' 때문에 졸업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듣는 수업이었고 평소 알고 지내던 '술꾼'들은 다 모여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후배님은 평점이 4점대에 육박할 만큼 좋은 성적을 가진 범생이가 아닌가.

"학점 높여야지요. 지난 번 들은 재무관리를 '삐 마이나(B-)'밖에 못 받았거든요. 입사 원서 쓰려면 최하 '삐 뿔(B+)' 이상은 받아야 하거든요."
"아~아."

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변하는 동안 나도 변했고 계절학기도 변하고 있었다. 이젠 졸업 그 자체를 위해 계절학기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입사 원서에 좋은 학점을 적기 위해, 혹은 (예전 같았으면 정말 희한하게 보였을) 조기졸업이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계절학기를 수강한단다.

"형이 '빵꾸' 나서 듣던 때와는 달라요. 지난 번 겨울학기 때 들은 과목이 점수 잘 안 나왔다고 이번 여름에 또 듣는 사람도 있어요. 예전에는 남들 놀 때 공부한다고 점수도 대충대충 줬잖아요. 지금은 택~도 없어요. 상대 평가라 다 잘 줬다가는 학생들이 가만 있지도 않아요."

후배의 전공은 재무관리의 '재'자와도 상관이 없다. 경영학에 대해 풍월이라도 읊지 않으면 취직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영학을 복수전공한단다. 그렇다고 해서 이 후배가 유난을 떠는 축도 아니란다. 복수전공뿐만 아니라 트리플 전공까지 있다고 하니, 내가 지금 대학을 다니면 어떻게 됐을까 눈앞이 캄캄해진다.

"방학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요? 영어학원도 다녀야 되고 인턴 사원 실습도 나가야죠. 돈 있는 애들은 방학하면서 연수 받으러 날라갔죠. 신입생 때 선배들하고 놀러 다니던 때가 좋긴 했는데 도무지 짬이 안 나네요."

학교 선배는 우리들에게 '엄마'였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나영준
나는 대학을 세 군데 다녔다. 학부와 대학원, 박사 학위를 각기 다른 대학에서 딴 건 아니고 소박하게 학부에 적을 두었던 곳만 세 군데라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필수'인 재수를 거쳐 '선택'의 삼수 끝에 나는 간신히 대학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입학 후 내가 처음으로 배웠고 배우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 건 술, 정확히는 막걸리였다. 술, 술, 술… 그리고 또 술. 저항을 안주 삼아 절망을 들이켜 버리자며 선배들은 '죽지 않을 만큼의' 술을 사 주었다.

때론 술에 취해 결코 웃지 못할 실수를 하기도 했다. 학교 뒷산에서 술을 마시다 "등록금 인상 반대"를 외치며 삭발을 한 총학생회장에게 "니가 중이냐, 언제 출가했냐?"고 고함을 치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집행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라렸지만 너그러운 학생회장이 웃으며 만류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나는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은 내게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줬다. 나는 친구네 학교에 자주 놀러갔는데 나중에는 친구의 선후배들과 두루 친분을 과시할 정도가 됐다. 그 중에는 88학번 선배 한 명이 있었는데 인품으로 치면 그분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선배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종종 그 집에서 신세를 졌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선배의 메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절대로 굶지 말고 챙겨 먹어라. 밥 먹고 목욕하고 이따가 학교에서 보자.'

그 훌륭한 선배는 우리들이 밥 사 먹고 목욕할 돈까지 가지런히 놓아 두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것도 매번. 비좁은 자취방에서 엉켜서 자면서도 불편하지 않았던 건 그런 선배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군 제대 후 95년엔 다른 대학에 다 늙은 신입생으로 들어갔을 때도 내가 사랑하는 막걸리 문화는 여전했다. '전설의' 80년대 학번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9년, 졸업과 동시에 평소 눈여겨 두었던 학문을 하고 싶어 다른 대학에 편입했을 때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대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잠시 다녔던 대학이지만 기억에 남은 것이라곤 "취업이 잘 안 돼 미안하다"는 학과장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젊다는 게 무기, 개똥철학이라도 읊어라

대학 축제의 모습. 대학에서 흥겨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
대학 축제의 모습. 대학에서 흥겨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손봉균
지금 생각하면 뭐 그리 술 먹고 할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건강에 좋지도 않고 돈만 쓰는, 생산성 없는 얘기 주고받는 게 뭐 그리 낭만이냐고, 자랑이냐고 할 수도 있다. 어떤 대학 생활을 하건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그런 선택의 여지도 없이, 사회가 이끄는 대로 순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일까?

나는 그래도 젊은 날에는 개똥철학이라도 읊으며 고민과 방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식상한 말로 '젊다는 게 무기' 아닌가. 입학과 동시에 각종 고시 패스와 대기업 입사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며 돌진하는 지금 대학생 후배들을 보면 대단하다기 보다는 가슴이 아려온다.

요즘 같이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는 날이면 막걸리 자국을 묻힌 채 어깨동무를 하고 골목을 누비던 대학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돌이켜 보면 당시 우리가 목말라 했던 것은 '술' 그 자체보다는 사람 그대로의 '체취'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05년 혹시 지금의 대학생들은 훌륭한 능력을 얻는 대신 따뜻한 사람을 잃어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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