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공부한 제자들은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만 해도 수백 명이 나왔다고 한다이종찬
지난 달 25일(토) 오후 1시. 경남 하동 옥종 출신의 정규화(56) 시인과 함께 찾은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는 퇴계 이황 (退溪 李滉,1501~1570) 선생과 더불어 조선 중기 대표적인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이 61세부터 7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지리산 깊은 계곡을 휘돌아 흘러내리는 티 없이 맑은 덕천강. 남명은 61세에 덕천강이 흐르는 이 곳, 천왕봉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덕천강변에 산천재를 짓고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남명은 퇴계와 같은 해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퇴계 또한 남명처럼 처음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려 70여회에 걸친 왕의 부름을 마다 했다. 하지만 퇴계는 결국 벼슬길에 나아가 예조판서, 대제학 등 평생 82개의 숱한 관직을 누리며 당대 최고의 학문을 뽐냈다. 하지만 남명은 오로지 초야에 묻혀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삼은 실천적 철학을 갈고 닦았다.
오죽 퇴계와 남명의 학문이 뛰어났으면 그 당시 사람들이 '경상좌도의 퇴계, 경상우도의 남명'이라고까지 했겠는가. 한 가지 재미난 것은 두 분 다 비슷한 때에 서실(書室)을 지었다는 점이다. 남명은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天齋)를, 퇴계는 안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으니, 영웅은 당대에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옛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