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슨생님 전주까장 푸로야구 보로 가요. 예?"

[동무들의 악다구니 7]해태타이거즈에 열광하던 시골 촌놈들의 나들이

등록 2005.07.08 11:40수정 2005.07.0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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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아이들은 비닐 포대로 만든 글러브를 끼고 즐겁게 야구를 했습니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얼마나 아팠던지요. 꽃밭으로 냇가로 야구공이 가면 수사관이 되어 찾아야 했답니다.
시골 아이들은 비닐 포대로 만든 글러브를 끼고 즐겁게 야구를 했습니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얼마나 아팠던지요. 꽃밭으로 냇가로 야구공이 가면 수사관이 되어 찾아야 했답니다.김용철
고교야구가 한창이던 70년대 후반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땡볕이든 눈보라가 날리든 아랑곳하지 않고 비닐부대로 글러브를 만들고 박달나무로 방망이를 깎아 야구에 빠졌다. 방학 때면 꼴망태를 팽개쳐놓고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들을 따라 초등학교에 가서 살다시피했다. 공이 단 한 개라 풀밭이나 냇가로 빠진 공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 또 얼마던가.


1981년까지는 라디오 시대였다. 고교야구 전성시대라지만 어떻게 공을 던지고 치는지를 잘 알지 못했던 우린 광주상고 다니던 형들이 가르쳐준 대로 마을 대항 시합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늘 이기기만 했던 우리 마을 아이들은 점방에서 빨던 하드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꿀맛이었다.

1982년부터는 서서히 직접 하는 야구보다 TV 앞에 배를 깔고 누워 간접체험을 하는 시기다. 그 때부터 난 프로야구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낫고 축구는 직접 운동장에 나가 응원을 하면서 즐기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5학년 때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이후 마을 어른들마다 뜯어말리는 통에 큰 형들이 하는 프로야구를 구경하는 또 다른 매력에 사로잡혔다.

지역 연고를 끼워 넣은 군사정권 3S 정책 중 눈에 드러나게 독보적이었던 스포츠는 단연 해태와 롯데, 삼성, OB 등 탄탄한 지방 연고에 MBC, 삼미까지 가세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 프로야구다.

날마다 각 팀마다 벌이는 순위와 타자 이름을 줄줄이 외고 안타, 홈런, 도루개수까지 꾀고 있었다. 뿐인가. 우린 롯데껌 하나 손대지 않고 오로지 해태 '브라보 콘'만 빨아댔다. 어찌 TV 앞을 떠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들이 교회에 빠진 때와 우리가 야구에 홀린 시기가 일치했다.

김우열과 윤동균, 박철순의 곰, 왼손 교타자 장효조와 헐크 이만수, 김시진이 버티고 있는 사자, 김용철과 만루홈런의 사나이 김용희에 강속구 투수 최동원이 버틴 거인,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과 최초이자 최후의 4할 타자 백인천이 신화를 창조한 청룡, 30승이 넘는 대기록을 작성한 장명부와 아마추어 출신 감사용이 빛났던 슈퍼스타즈... 어느 한 팀 만만하지 않았다.


관록의 우승 신화를 일궜던 해태는 우리들의 희망이었다. 아홉 번이나 우승하여 금자탑을 쌓은 해태타이거즈는 안타를 많이 치는 팀이 아니다. 타율은 낮더라도 생산성 있는 야구를 한다. 꼭 쳐야할 때 한방 터뜨려 주고 이겨야할 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잠깐 김동엽이 있었으나 거구 김응룡 감독을 선봉으로 악으로 깡으로 똘똘 뭉친 정신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 야구에서 도루의 대명사며 어떻게든 걸어 나가면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는 골칫덩어리가 호랑이에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일권이었다. 요즘 다소 힘에 부치는 듯하지만 여전히 야구천재 이종범이 대를 이어가고 있잖은가.


초창기 해태의 중심에는 김봉연이 있었다. 어느 팀 투수고 간에 훤칠한 키에 배짱이 두둑한 홈런타자 김봉연 앞엔 벌벌 떨고 쩔쩔맸다. 인터벌이 길어지고 걸러내기 일쑤였다. 둘째 해엔 6월 말 대형교통 사고로 100바늘 이상 꿰매 우리들 애간장을 녹게 하다가 한달도 안돼 당당히 일어서 콧수염 원조로 불리게 되어 더욱 사랑을 받았다.

여기에 해태타이거즈에는 만능스타 김성한이 있었다. 첫 해인 82년에는 타율 3할5리와 10홈런, 69타점의 빼어난 타자였고 투수로서 10승5패 1세이브로 방어율 2.88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김성한은 타자이자 투수이자 포수마스크까지 쓰는 멀티플레이어로 야구판에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뿐인가. 그가 보여준 오리궁둥이타법은 방안에서도 따라서 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기에 대한민국 야구에서 붙박이 1번 타자 김일권은 훔치는데 남달랐다. 다부진 키에 뛰었다하면 2루까지 내달리니 그가 나가면 견제하느라 상대편은 골치가 아파졌다. 갈비시 차영화가 다리를 이어주면 호타준족이던 3번 김성한에 4번 타자 김봉연이 뻥 한번 치면 일순간 역전 드라마를 만드니 호쾌 상쾌 통쾌함에 전율을 느꼈다.

다른 팀들이 3, 4, 5 클린업트리오 세 명 중 5번이 다소 쳐지는 듯한 형국이었다면 호랑이 뚝심은 5번, 6번 타자에 있었다. 김준환과 김종모가 주인공이다. 둘은 다른 팀이었다면 3, 4번을 칠 힘과 정교함까지 갖췄다.

여기에 김우근과 구부정한 김종윤 그리고 이듬해 고국무대를 밟은 재일동포 8번 홈런타자 김무종까지 가세하여 안방마저 든든하니 난공불락이자 요새였다. 타자 9명 중 7~8명이 김씨 일색이라 같은 성씨가 줄줄이 나오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남다른 재미였다. 우리 집안이 만든 팀에 잠시 다른 성씨 한둘을 끼워 넣어 운영하다가 나머지만 김씨로 채우면 되는 줄 알았다.

콧수염을 달고 살아와 건들거리는 타법으로 투혼을 발휘한 김봉연 덕에 이태 째인 1983년 해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들쭉날쭉 이상윤에 김용남 선수가 제몫을 했다.

붉은 호랑이와 그들이 입은 유니폼을 보기위해 우린 안달이 났다. 중학교 3학년이던 때까지 광주 땅을 한번 정도밖에 밟지 않았던 우린 광주에서 출퇴근을 하시면서 우리 골짜기 아이들에게 유달리 친절하셨던 수학 선생님께 방학을 일주일 남겨두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선봉에 섰다.

"슨생님! 양지마을 애들하고 푸로야구 보러 가요."
"그래 너희들도 야구 좋아하냐?"
"함은요."
"몇 명이나 되냐?"
"한 일곱 명은 되겠지라우."
"그러면 방학하는 날 옷이랑 다 챙겨 오거라."
"감사헙니다 슨생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야, 됐어. 됐당께."
"뭐가야?"
"잉, 강대철슨생님께서 우릴 푸로야구 보러가게 해주신댜."
"귀때기(내 초중학교 때 별명)야 참말이냐?"
"진짜라니까는…. 요 새끼들이 맨날 속고만 살았나. 근디, 딴 마을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왜야?"
"얌마 너도나도 간다그면 누가 감당할라고 그려."


이렇게 단체로 많은 수가 도시에 나가보기는 처음이다. 야간 경기를 보려면 잠도 자야하고 깡촌에 살던 우리가 입장권이 얼마인지도 모르는데 선생님께서 차비만 들고 오라니 이 얼마나 기쁜가.

영웅들을 만나러 가기 전날엔 잠이 오질 않았다. 금요일인 그날 즐거운 방학보다도 야구장 가는 하루가 더 기다려졌다. 세면도구와 옷가지에 왕복차비와 나들이에 필요한 군것질거리에 필요한 돈을 각자 타왔다.

청바지로 갈아입고 학교를 나섰다. 선생님들과 우리가 탄 차는 빼곡히 찼지만 그게 대수랴. 30리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곧게 뻗은 왕복 2차선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호남고속도로를 조금 달리다가 곧 광주에 도착하였다.

왜 하필이면 촌놈들이 가던 날 광주에서 하지 않고 전주에서 했을까요? 쌍방울이 없던 때는 전주와 군산에서 가끔했는데 기가 찰 노릇이었답니다. 그놈의 프로야구에 푹 빠져 살았던 때가 즐거웠습니다.
왜 하필이면 촌놈들이 가던 날 광주에서 하지 않고 전주에서 했을까요? 쌍방울이 없던 때는 전주와 군산에서 가끔했는데 기가 찰 노릇이었답니다. 그놈의 프로야구에 푹 빠져 살았던 때가 즐거웠습니다.김용철
우리들은 밤이 되기 전에 자리를 잡아 종일 프로야구에 취하고 싶었다. 다들 두암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보자기만 던져 놓고 옷을 벗지 않고 서성였다.

"슨생님 저녁 6시에 하니까 4시 반에는 나가야 되지 않겄어요?"
"그래, 어디 전화 한번 해보자."


수화기를 든 선생님께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 모두 모여 촉각을 곤두세웠다.

"오늘 프로야구 몇 시에 합니까? 예, 6시 맞아요? 뭐라구요? 잠깐만요. 오늘 광주에서…."

심상치가 않았다. 간단한 통화면 될 것을 자꾸 길어지고 선생님 목소리엔 힘이 없어보였다.

"야, 오늘 광주에서 하지 않는단다. 이번 3연전은 전주에서 한데."
"예? 뭐 이런 일이 있답니까?"
"글쎄 말이다. 좀체 없는 일인데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네. 아이구 이를 어쩐다냐?"
"안돼요. 다시 잡을 수 없는 기회거든요. 집에서 허락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야 우리 전주까장 가자."
"그래요 선생님 전라북도로 가요."
"……."


아이들이 나서 매달렸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슨생님 지금이라도 가면 충분히 도착할 거예요 슨생니임~"
"……."


말없이 어리광을 받아주던 선생님께서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야, 오늘은 우리 집에서 맛있는 것 몽땅 사다가 배 깔고 먹으면서 보자. 알았쟈? 담엔 꼭 무등경기장으로 가자꾸나."

사전에 확인하지 않은 선생님까지 미워지기 시작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열광의 도가니, 열전의 현장에 서고 싶었다. 하늘이 돕질 않은데 어쩌겠는가.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난생처음 쇼핑이라는 걸 하고나서 빈둥거리다가 뒤척이며 수박을 잘라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얼마나 허탈했는지 보는 둥 마는 둥 일찍 잠에 빠진 아이도 있었다.

여름에도 시원한 시골에서 살았던 내가 홑이불을 주지 않아 베개를 끌어안고 자자 다음날 아침 놀림거리가 되었다.

"슨생님, 저는이라우 배를 덮지 않으면 배탈이 난께 그랬어라우."
"그래도 우습잖냐?"
"뭐가요?"
"3개나 끌어안고 자드라."
"헤헤."


못내 아쉬워 토요일 전주로 가자고 한 번 더 말해보았지만 들어주시지 않았다. 그렇게 지상의 별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속으로 '차라리 전주에 비나 확 쏟아져버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응원하였던 건지 선동열, 이종범이라는 대스타가 있었던 건지 운영하던 기업이 바뀔 때까지 신바람 나게 녹색그라운드를 누빈 호랑이들은 해를 거르지 않고 우승으로 보답했다.

아직도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뇌리에 있다. 왕년의 스타들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삽화를 그려준 김용철씨 고맙습니다. 언제 야구나 한번 보러 갑시다.

덧붙이는 글 삽화를 그려준 김용철씨 고맙습니다. 언제 야구나 한번 보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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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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