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우가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는 듯 했다.
"나를 어찌 생각하느냔 말이다."
박규수가 다시 물었다.
"대감을 제 상전이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대감께오선 제 어버이이십니다. 대감은 제 하나뿐인 스승이십니다. 대감께오선 저를 아시는 단 한 분의 종자기이십니다."
"중군, 자넨 나를 어찌 생각하는가?"
"영감을 모신 지 그리 오래지는 않았사오나 영감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애민의 마음까지 모든 것을 효칙하고 싶은 분이시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라…."
박규수가 뇌이다가 자신이 손수 만든 지구의를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다 지구의를 세워 임의 점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에 중국이 어디에 있는가?"
"…"
"저리 돌리면 미리견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으로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中國)이 된다. 오늘날 어디에 중국이 있는가."
"…"
군관 윤석우와 중군 이현익은 박규수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뿌리 깊은 조선의 통념과 배치되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이런 엄청난 말을 현직 관찰사에게서 듣는 이현익이야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지만,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윤석우조차도 오늘 이현익까지 앉아있는 자리에서 서슴없이 말을 꺼내는 박규수의 태도에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진실로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비록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나아가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박규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꽤 고심한 끝에 말을 뱉기로 작정했는지 망설임 없이 흘러 나왔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민생이 빈곤하기에 국내 산업을 일으켜서 나라 안의 이원(利源)을 다 개발하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헌데 오늘날 나라를 틀어막고 쇄국의 기치를 내걸고 있음은 가히 우매함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현익도 박규수가 북학파의 통상개국론을 근간으로 개화사상의 성향을 가지고 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상황 변화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곧 '기존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의미하며, 기존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자세는 세계질서와 문명에 관한 중국중심적 가치관의 붕괴와 조선 내 신분제도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되므로 실로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현익은 그 짧은 찰라에 팽팽히 머리를 굴렸다. 내 앞에서 관찰사가 그런 말을 내뱉었다. 어찌 해석해야 하나? 날 신임하는 것인가, 아니면 날 떠 보는 것인가? 작년,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때 이양선에 협상차 올랐다 사로 잡힌 적이 있는 터여서 양이에 대한 편견이 강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이현익은 아직도 머리를 굴리느라 뭐라 입술을 떼지 못했다.
"중군, 여하한 일이 있어도 나를 따르겠는가?"
그때 먼저 박규수가 말을 던졌다. 중군을 바라보는 눈이 깊었다. 이현익은 그 눈빛이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가득 담은 애정의 눈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다만......"
"다만…?"
"지금 하시는 말씀이 혹시 그…헛,험…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옵니까?"
중군 이현익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역모'라는 말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하하하하, 중군 이사람 겁 먹기는…, 설마 그런 지경까지야 가겠나. 다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절실하단 뜻이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법(西法)이 전래하면 이적금수(夷狄禽獸)됨을 면할 수 없다고 하나 나는 오히려 동교(東敎)가 서역에 들어가서 모두 인간화 할 것이라고 보네. 사실 개항은 필요한 일이야. 그러나 힘을 갖지 못한 개항은 재앙이 될 뿐 대안이 되지 못할 걸세. 그 때를 위해 우리만이라도 힘을 길러 놓아야 하네. 그래서 내 특별히 병의 일을 맡는 자네 둘에게 따로이 이름일세."
"그런 일이라면 병마절도사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일선에서 병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자네들이 아니겠는가. 휘하 군관들 단도리에 부실함이 없이하여 지휘체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게. 일이 터진 다음엔 늦느니......윤 비장, 포군 모집은 어찌되었느냐?"
"예, 운현궁에서 내려온 별비전으로 포군 300을 모집하는 데까지는 진척이 있었사오나 조련에 필요한 경비는 마련하지 못한 까닭에…."
윤석우가 말을 흐렸다.
"아직은 전력으로 활용할 만한 처지가 아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경비를 마련해 줄 터인즉 포군을 정예로 조련토록 해 놓거라. 그리고 포군 만큼은 윤 비장의 휘하에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도록 하라."
"예. 전력을 다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중군. 당장 평안도에서 쓸 수 있는 진영군이라면 몇이나 되겠는가?"
"그게…, 당장 편성이야 이천을 넘는 군졸이 있사옵니다만은…. 가용한 장졸이 얼마나 될 줄은…."
중군 이현익이 몸들 바를 몰라했다.
"북방의 요충이기도 하거니와 도성의 방어에도 더 없이 중요한 곳을 꼽음에 평안도를 빼놓을 수 없거늘, 고작 이천이라…. 그나마도 장담하지 못한다?"
"송구스럽사옵니다."
"하긴…, 그게 어디 자네 혼자만의 탓이겠는가. 아무튼 오늘 이후로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야."
박규수가 쐐기를 박았다.
"저 외람된 말씀이오나 영감께오선 이토록 급작스레 조바심을 내시는지요?"
중군 이현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촌광음이 불가경이로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없음일세."
"소인 불민하여 한 뜻에 저의를 캐지 못하겠나이다."
이현익이 재차 묻자, 박규수가 조용히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무슨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이현익과 윤석우는 그냥 따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수행하려는 수직 사령을 물리친 박규수는 내아 뒷문을 통해 감영 뒷숲으로 들었다.
"바로 이들 때문이지."
뒷숲에 이른 박규수가 보퉁이에서 발화통 하나를 꺼냈다.
"이들이나, 양인을 비롯한 청국이나 일본, 그도 아니면 조정의 권문세도들. 이 중 하나, 혹은 둘과는 필연적으로 부딪쳐야 할 듯 하다."
말을 하면서 발화통 뚜껑을 따는 모양이 마치 오랜 시간 숙련한 자의 동작처럼 차분했다. 뚜껑의 뒷면을 돌려 발화통 몸체에 딱 부딪쳤다. 화약과 초석이 타는 매캐한 내음과 치이익 거리는 소리가 허연 연기와 버무려져 피어올랐다.
"귀를 막게나."
숲 우묵한 곳으로 힘껏 발화통을 던져 넣은 박규수가 말했다.
"꽝."
일행이 귀를 막고 몸을 낮춘다 싶은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불꽃과 연기가 흙덩이를 밀어 올렸다.
"무, 무엇이옵니까?"
이현익이 땅바닥에 붙다시피 엎드린 채 귀를 감싸며 물었다.
"엊그제 놓친 그 자들. 자네가 애석히도 운이 나빠 그 자들을 놓쳤다 생각하는가?"
"…."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현익은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으로 박규수를 쳐다보았다.
"그 자들이 감영 안에서 이것을 쓸 뻔 했네. 나졸이 서른이면 그들을 잡을 수 있었을 것 같은가? 한 오십 명쯤이면 그들을 잡을 수 있겠는가? 어림없는 소리 이것 몇 통이면 수십의 병졸이 어육이 되었을 것이야. 바로 그자들 때문이네. 이들이 지금까지 보인 면모는 이런 폭약통 몇 개로 모양새를 재며 세를 부풀릴 위인들이 아님을 보여주네. 머지 않아 환란이 있을 것이야. 그게 이들이든, 양이든 간에 말이야. 시간이 없어. 우리가 준비를 갖춰 때를 맞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바람에 국운이 풍전등화의 형국이 될 게야."
엎드린 이현익의 귀에는 박규수의 비장한 육성이 쟁쟁히 맴돌고, 눈에는 화연이 걷힌 구릉 좌우 나무에 박힌 수십 개의 삼각형 철 파편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아직도 관찰사의 의중을 밝게 알진 못하겠으나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그에 대비한 준비가 시급함을 느낄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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