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 부는 지리산 주능선을 타다

[49일간 무지원 단독 백두대간 연속종주기 2]

등록 2005.07.12 11:04수정 2005.07.1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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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으로 간다. 가는 길에 제석봉의 고사목지대를 지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고사목. 김정호의 세한도가 생각난다. 꼿꼿하면서도 분명한 자태에 넋을 잃는다. 햇빛에 반짝이던 고사목은 은빛의 물결이다. 주능선으로 접어들자 포기하겠다는 마음이 스르르 사라진다. 햇빛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땅 아래는 따가운 봄 햇살이지만 아직 지리산 높은 곳까지는 봄소식이 더디나 보다.

해가 배낭의 어깨끈 위에서 부드럽게 가슴으로 흐른다. 장터목대피소이다. 배낭을 풀고 일박한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양초같다. 새벽에 출발해서 3시 도착했으니 산을 기어서 오른 셈이다. 밤엔 잠이 오지 않아, 산장 아래 조리장으로 내려갔다. 서울서 왔다는 산행팀과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한다. 백두대간 성공하시라고 격려를 받는다. 하늘을 본다. 푸른빛의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아직 별빛이 차갑다. 북극성을 본다. 첫날이다. 끝까지 가야할텐데. 배낭이 무겁다.


만복대 가는 길
만복대 가는 길정성필
아침엔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눈이 부었고, 어깨가 부었다. 무릎의 통증은 심하다. 걷기가 힘들었다. 일어나야 갈 수 있다. 누워 있고 싶어도 누워 있을 수만 없다. 백두대간 도상거리로만도 700km가 넘는 그 길도 한걸음을 떼어야 다음 걸음을 갈 수 있다. 일어나는 게 힘들다. 상체를 세우고 앉았다. 밤새 꿈과 땀이 섞여 침낭이 젖었다. 옆의 누군가가 왠 신음소리가 그리 심하냐고 묻는다. 자신도 잠을 못 잤다고 한다. 괜챦냐고 걱정해준다. 아침이나 함께 먹자고 한다. 고맙다.

첫걸음부터 힘들었다. 무릎이 아팠고 발이 부어 등산화를 신기 힘들었다. 그러나 걸어야 한다. 걷다 보면 나아질 것이다. 어차피 몸은 적응하게 되었다.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힘이 있다. 몸을 믿어야 한다. 몸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몸을 믿고 걸어야한다. 때론 나약한 것이 정신력일 거다. 몸을 믿고 첫 걸음을 걷는다. 첫걸음을 떼고 한 시간쯤 걸으니 모든 무릎과 발, 온몸의 근육통이 합쳐진 통증을 잊는다.

세석을 지나, 선비샘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식사 후 잠깐 쉰다는 게 잠이 들었다. 어깨가 으스스 떨려 눈을 떠보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큰일이다. 이대로 여기서 텐트를 칠까하다, 벽소령까지 가기로 한다. 기울어가는 봄 햇살이 나뭇잎 위에 파랗게 얹힌다. 무릎의 통증이 다시 시작된다. 벽소령에 도착할 땐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였다. 편한 잠자리를 원했다. 별을 본다. 물 뜨러 가는 일 조차 로보캅처럼 걸어야했다. 내일은 노고단까지 가야한다.

뱀사골로 내려서서 다시 올라가는 계단이 지루하다. 내리막에서 무릎이 너무 아파, 신음 소리를 낸다. 가다 쉬다, 가다 쉬다를 반복한다. 계단에 앉아 쉬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불쌍하게 쳐다본다. 가야할 길은 먼데,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봄꽃이 지천인데도, 꽃도 풍경도 눈에 들지 않는다. 가야할 곳만 생각하고 간다. 얼른 지리산을 벗어났으면 좋겠다.

노고단을 벗어나 새벽에 만복대를 향해 간다. 날씨 변덕이 심하다. 안개가 끼어 반야봉과 지나왔던 능선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걷는 길 밖에 없다. 몸이 안개에 젖고 땀에 젖는다. 추워지기 시작해서 옷을 껴입고, 그 위에 판쵸우의를 덮어 쓴다. 그래도 한기가 몸속을 파고든다. 햇살은 두꺼운 안개의 군단에 막혀 내려오질 않는다. 안개와 햇살의 싸움이 구름위에서 치열하나보다. 가끔 햇살이 내려오기는 한다.


만복대에서
만복대에서정성필
구름과 안개를 뚫고. 그러나 잠깐이다. 이슬비처럼 비가 내린다. 만복대로 향하는 걸음이 무겁다. 가는 길 내내 헬기장이 곳곳 나온다. 헬기장을 볼 때마다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릎이 아프다. 더 이상 가다가는 무릎이 망가질 듯하다. 걱정이 앞선다. 나약한 마음을 몸에 의지하고 간다. 몸은 생각보다 강할 것이다. 졸립다.

몸이 점점 추워진다. 발목에 힘이 빠진다. 만복대 들어서기 전 발목이 꺾여 몇 번 넘어진다. 곳곳에 멧돼지가 땅을 파 논 흔적이 있고, 짐승의 배설물들이 길가에 있다. 겁이 났다. 하지만 몸은 추웠고 발목엔 힘이 없다. 짐승보다는 더 가지 못할 것 같은 내 몸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백두대간 시작부터 이정도면 마지막 날까지 어떻게 버틸까 싶은 게 암담해진다. 그래도 가야한다. 도전은 편한 자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사십 년의 세월을 편하게만 살아오지 않았나. 한번쯤 이런 도전을 해야한다. 성취감이란 걸 맛보고 싶다. 이겨내고 싶다.


고리봉으로 가는 길 능선 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어 돌아간다. 길가에 고사리와 나물이 지천이다. 뜯고 싶어도 배낭이 너무 무겁다. 이슬비에 젖어 축축한 길에서 미끄러진다. 하늘이 뿌옇게 보인다. 일어나기가 힘들다. 이대로 가다간 탈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이라도 자고 싶다. 넘어진 상태에서 배낭을 오르막 경사에 기댄 채 잠든다.

잠깐 동안만이라 다짐한다. 이런 날씨에 깊이 잠들었다간 저체온증으로 죽는다. 한 삼 십 초정도 눈붙였나? 시계를 보니 삼 분여 잤다. 깜빡잠이다. 일어나보니 몸이 달라졌다. 배낭이 덜 무겁고, 발목이나 무릎이 덜 아프다. 걷기가 한결 수월하고 죽을 것처럼만 여겨졌던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난 게 확실하다. 몸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삼분여의 짧은 시간에 몸 상태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만복대에 도착했다. 오르는 길에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줄이 쳐져 있다. 줄을 잡고 오른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줄을 잡고 줄에 기대어 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고통스럽다. 입에선 단내가 난다. 숨이 차고, 다시 하늘이 노래진다. 하지만 쉴 수 없다. 바람이 세차다. 만복대에 도착하니 바람이 엄청나게 세다. 차가운 공기에 숨쉬기도 힘들다.

고리봉에서
고리봉에서정성필
오늘이 5월 중순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겨울 같다. 작년 10월말 지리산에서 첫눈을 맞을 때도 이렇게 춥지 않았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긴팔과 방풍복 그리고 판초우의사이로 바람이 파고든다. 만복대에서 멋진 노고단의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빠른 시간 안에 내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체온증이 올 것 같다. 이가 딱딱 부닥친다.

만복대를 내려서면서 바람이 잠잠해진다. 살 것 같다. 만약에 날이 덥다고 긴팔 셔츠와 방풍복을 준비 안했더라면? 끔찍하다.

나는 지금 걷는다. 걸음은 자유다. 자유로이 걷고 있다. 그러나 그 걸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온갖 통증과 무거운 배낭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백두대간을 하는 자유. 백두대간을 걷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도전을 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나를 분리시켰다. 내 나이 사십에 떠났다. 처음으로. 항상 가정과 집, 교회, 학교만이 내 삶의 궤적이었다.

어느 순간 벗어나지 않으면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듯했다. 선택해야할 상황에서 나는 내 나이의 다른 친구들이 선택하는 흔한 방법 대신에 백두대간을 선택했다. 걸음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가장 원시적인 이동 수단인 걸음을 통해 나를 시험하고 싶었고, 그 시험을 통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모범적인 사회인이었고,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한번도 그 틀을 깨본적 없는 모범 답안지였다. 도전은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내 삶의 자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가능한 멀리, 가능한 오랫동안 내 삶의 자리를 비워두고 비워둔 자리를 멀리서 오랜 시간 동안 보았을 때 내가 보일 듯했다. 내가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정령치에 도착한다. 휴게소에서 국수를 사먹는다. 주인아주머니가 큰 배낭과 땀 절은 내 얼굴을 번갈아 본다. 지나가던 손님도 불쌍한 듯 쳐다본다. 그 사이에 내 몰골이 많이 변했나 보다. 거울 볼 시간도 없었다. 가게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수염에 까매진 얼굴에, 추위로 퍼러둥둥 변한 입술. 사람 몰골이 아니다. 주인아주머니가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묻는다. 씨익 웃는다. 좋아서 한다고 대답한다.

그만두라고 그러다가 험한 짐승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해준다. 혼자 무섭지도 않냐고 묻기도 한다. 속으로 대답한다. "자유를 가지고 나를 변화시키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도전중입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변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겁니다"라고 속으로 말한다.

아주머니가 김치를 싸주신다. 배낭이 무거워 받을까하다, 그동안 먹고 비운 쌀과 부식만큼 공간이 있어 받는다. 고맙다라는 인사를 하고 고리봉을 넘는다. 바위가 험하다. 정상에 오르니 철쭉이 제철이다. 온통 선홍색이다. 가슴이 설렌다. 고리봉정상에서 잠시 배낭을 풀고 철죽을 감상한다. 앉아 있으니 발소리가 들린다.

안개 속에서 세 명의 남녀가 나들이 복장으로 나타난다. 봄옷으로 가볍다. 여자 하나는 추워서 얼굴이 하얗다. 비로봉 다녀오는 길이란다. 가다, 안개가 너무 심해 돌아오는 길이란다. 철쭉을 보러 갔다 안개 때문에 돌아온단다. 옷을 따듯하게 입은 젊은 여자는 얼굴이 봄꽃처럼 환하다. 꽃 같은 미소로 꼭 성공하라고 격려하고 내려간다. 고맙다. 성공하고 싶다. 끝까지 걸어 성공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종주했던 기록입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종주했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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