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봉에서정성필
오늘이 5월 중순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겨울 같다. 작년 10월말 지리산에서 첫눈을 맞을 때도 이렇게 춥지 않았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긴팔과 방풍복 그리고 판초우의사이로 바람이 파고든다. 만복대에서 멋진 노고단의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빠른 시간 안에 내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체온증이 올 것 같다. 이가 딱딱 부닥친다.
만복대를 내려서면서 바람이 잠잠해진다. 살 것 같다. 만약에 날이 덥다고 긴팔 셔츠와 방풍복을 준비 안했더라면? 끔찍하다.
나는 지금 걷는다. 걸음은 자유다. 자유로이 걷고 있다. 그러나 그 걸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온갖 통증과 무거운 배낭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백두대간을 하는 자유. 백두대간을 걷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도전을 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나를 분리시켰다. 내 나이 사십에 떠났다. 처음으로. 항상 가정과 집, 교회, 학교만이 내 삶의 궤적이었다.
어느 순간 벗어나지 않으면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듯했다. 선택해야할 상황에서 나는 내 나이의 다른 친구들이 선택하는 흔한 방법 대신에 백두대간을 선택했다. 걸음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가장 원시적인 이동 수단인 걸음을 통해 나를 시험하고 싶었고, 그 시험을 통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모범적인 사회인이었고,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한번도 그 틀을 깨본적 없는 모범 답안지였다. 도전은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내 삶의 자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가능한 멀리, 가능한 오랫동안 내 삶의 자리를 비워두고 비워둔 자리를 멀리서 오랜 시간 동안 보았을 때 내가 보일 듯했다. 내가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정령치에 도착한다. 휴게소에서 국수를 사먹는다. 주인아주머니가 큰 배낭과 땀 절은 내 얼굴을 번갈아 본다. 지나가던 손님도 불쌍한 듯 쳐다본다. 그 사이에 내 몰골이 많이 변했나 보다. 거울 볼 시간도 없었다. 가게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수염에 까매진 얼굴에, 추위로 퍼러둥둥 변한 입술. 사람 몰골이 아니다. 주인아주머니가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묻는다. 씨익 웃는다. 좋아서 한다고 대답한다.
그만두라고 그러다가 험한 짐승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해준다. 혼자 무섭지도 않냐고 묻기도 한다. 속으로 대답한다. "자유를 가지고 나를 변화시키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도전중입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변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겁니다"라고 속으로 말한다.
아주머니가 김치를 싸주신다. 배낭이 무거워 받을까하다, 그동안 먹고 비운 쌀과 부식만큼 공간이 있어 받는다. 고맙다라는 인사를 하고 고리봉을 넘는다. 바위가 험하다. 정상에 오르니 철쭉이 제철이다. 온통 선홍색이다. 가슴이 설렌다. 고리봉정상에서 잠시 배낭을 풀고 철죽을 감상한다. 앉아 있으니 발소리가 들린다.
안개 속에서 세 명의 남녀가 나들이 복장으로 나타난다. 봄옷으로 가볍다. 여자 하나는 추워서 얼굴이 하얗다. 비로봉 다녀오는 길이란다. 가다, 안개가 너무 심해 돌아오는 길이란다. 철쭉을 보러 갔다 안개 때문에 돌아온단다. 옷을 따듯하게 입은 젊은 여자는 얼굴이 봄꽃처럼 환하다. 꽃 같은 미소로 꼭 성공하라고 격려하고 내려간다. 고맙다. 성공하고 싶다. 끝까지 걸어 성공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종주했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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