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돈 갖곤 못살아, 굿바이 내 조국"

[해외리포트] 서유럽으로 떠나는 발트3국의 고급두뇌들

등록 2005.07.12 18:39수정 2005.07.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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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빌뉴스 버스터미널. 젊은 사람들은 이 버스터미널을 통해 서유럽으로 떠난다.

빌뉴스 버스터미널. 젊은 사람들은 이 버스터미널을 통해 서유럽으로 떠난다. ⓒ 서진석

리투아니아 최대의 인테리어 잡지사에 근무하던 유르가(가명)는 올해 초 직장을 그만두고 덴마크로 이주했다. 그녀가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한 한 리투아니아 내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잡지사 편집일을 마다하고 덴마크로 이주하게 된 사연은 다름 아닌 '돈' 때문이었다.

잡지사에서 일할 당시 세금을 제하고 받는 월급은 400리타스(한화 약 15만원, 150달러) 정도. 리투아니아의 물가가 저렴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달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리투아니아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려면 최소 400불 정도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능성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나은 직장을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문제는 리투아니아에서 어학분야 석사학위를 갖고 있는 유르가가 덴마크에서 학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환경미화원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시청 국제협력과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바이다스(27). 그는 미국에서 유학을 마쳤으며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빌뉴스를 대표하여 전 세계를 다니는 그의 직업은 많은 젊은이들이 꿈에 그릴만한 것이지만, 정작 그의 월급은 한달 35만원(한화기준) 정도에 불과했다. 그 월급으로는 아파트 유지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했고, 생활은 늘 빚더미 위에 있었다.

a 빌뉴스 시청 국제협력과의 일을 그만두고 런던 이지젯에 스튜어드로 취직한 바이다스. 그는 런던의 새 직장에 만족하고 있다.

빌뉴스 시청 국제협력과의 일을 그만두고 런던 이지젯에 스튜어드로 취직한 바이다스. 그는 런던의 새 직장에 만족하고 있다. ⓒ 서진석

마침내 그는 영국의 저가항공사인 이지젯(EasyJet)의 스튜어드로 이전 취업했다. 그가 받는 돈은 영국 현지인들과 비교하면 그다지 많은 액수가 아니지만 영국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바이다스는 그간의 빚을 전부 청산하고 자기 자신에게 투자할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난 매일 아침 자신이 원숭이가 아님을 다짐하고 살아야하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에서 살 때는 번 돈을 전부 집과 기본적인 생활에만 써도 부족했지만, 지금은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많은 편의를 누리며 살고 있다."

"동유럽국가가 서유럽 국가를 먹여 살린다"

2005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 발트3국에서는 두뇌유출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두뇌유출이란 고학력 노동자와 전문인들이 높은 월급과 가능성을 찾아서 조건이 더 나은 선진국으로 대량 이동해 감으로써 고급인력이 고갈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독일 통일 직후 동독에서 서독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한차례 사회문제화 된 사례가 있다. 당시 동독에서는 의료진들이 대거 서독으로 이동하면서 의료진 부족현상을 겪었을 만큼 문제가 심각했다.

실제 1995년에서 2002년까지 구동독에서는 59세 이상의 의료진들이 전체 인원 중 58% 증가한 반면 젊은 의료진 수는 31% 감소했고, 2002년에는 35세 이하 의료진이 17%로 떨어졌다.


a 폴란드 의사들이 많이 일하는 폴란드 국경 근처 프랑크푸르트 오더 의 중심 종합병원.

폴란드 의사들이 많이 일하는 폴란드 국경 근처 프랑크푸르트 오더 의 중심 종합병원. ⓒ 서진석

의료계의 이러한 경향은 2005년 유럽연합 가입 직후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와 체코에서도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3국에서도 대학교를 졸업한 젊은 인력들 중 많은 수가 서유럽에서 일자리를 찾는데 우선순위를 둔다,

이런 현상은 유럽연합 통합에 반대하고 있는 통합 회의론자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다. 경제성장률이 1% 수준인 서유럽 국가들은 젊은 노동인구 급감으로 노년인구가 급증하는 현상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령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젊은 인력의 유입뿐이라는 것. 때문에 이들 통합회의론자들은 "서유럽과 경제적 격차가 큰 동유럽의 국가들을 성급하게 유럽연합으로 편입시킨 저의가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실제 유럽연합 가입 당시 발트3국은 6%를 웃도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지만, 스페인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유럽연합의 큰 형님들은 1% 정도의 성장률을 보였을 뿐이다. 현재 발트3국의 젊은 인력이 선호하는 나라는 노동시장을 비교적 먼저 개방한 아일랜드, 영국과 구직이 쉬운 스페인 등이다.

이런 노동시장의 개방을 통한 인력의 이동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언어과 경력 등의 문제로 현지인들이 종사하기 싫어하는 3D업종으로만 몰리게 돼 '두뇌유출'이 아니라 '두뇌낭비'라는 지적이 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으로 떠난 여성들 중 많은 수가 매춘업으로 팔려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심각하다.

"기다려라, 우린 돌아온다"?

a 빌뉴스 중심가의 쇼핑몰.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그들의 적은 수입때문에 이곳에서 쇼핑할만한 여유가 없다.

빌뉴스 중심가의 쇼핑몰.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그들의 적은 수입때문에 이곳에서 쇼핑할만한 여유가 없다. ⓒ 서진석

두뇌유출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은 임금 차이 때문이다. 발트3국의 낮은 임금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외국투자를 유치시킬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겠지만, 노동자들의 차원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서유럽의 평균임금이 발트3국에서는 세배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단순히 돈 문제만 거론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유럽연합 기회원국들의 경우 자유시장경제가 비교적 늦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동유럽보다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다양하다. 같은 회사라 하더라도 규모나 조직 면에서 발트3국 현지에 진출해있는 회사들보다 서유럽에 있는 회사들이 훨씬 대규모이며, 자기 발전 차원에서도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해 준다.

때문에 젊은 학생들의 경우 대학과정을 마치거나, 마치기 전이라도 실습이나 경험습득 차원에서 서유럽에서 일자리를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 이유로 발트3국의 주요 대학교에는 방학이나 아니면 좀더 장기간으로 영국, 아일랜드 등에서의 특별체험 프로그램을 알선해주는 상품이 학생들의 눈길을 끌고 있고, 학생들 간에 외국취업정보를 공유하는 자치기관까지 생겨났다.

젊은 두뇌들의 해외 유출에 대해 리투아니아 사회안전 및 노동부 관계자는 "아직 두뇌유입보다 두뇌유출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리투아니아 경제사정이 좋아져 서유럽과 격차가 줄어들게 되면 곧 유출과 유입이 비슷한 단계에 이르는 '두뇌순환' 현상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그 격차를 줄이는 시간이 얼마나 들지는 알 수 없다.

a 빌뉴스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젊은 리투아니아인들의 탈리투아니아 현상을 막을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빌뉴스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젊은 리투아니아인들의 탈리투아니아 현상을 막을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 서진석

그렇다고 두뇌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고급인력의 두뇌유출을 막기 위해 세금부담 줄이기 및 '젊은 인력들의 리투아니아 귀환을 위한 프로젝트'(사회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구체적 방안 모색)를 준비 중이다.

해외로 일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 상당수는 자리가 잡히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또 독립 후 10년간 발트3국이 이뤄놓은 경제적 성과를 되짚어보면 조만간 서유럽과의 격차를 따라잡을 것이라는 밝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사회적 변환기에 따르는 필연적 고통이라는 것.

하지만 한 리투아니아인의 '경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박사학위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리투아니아 전역을 다니며 민속자료 수집을 하는 나에게 그가 한 말이다.

"시간이 될 때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세요. 현재 리투아니아의 자연 출생률이 계속 마이너스로 치닫고 있거든요. 게다가 젊은 사람들은 다 외국으로 가려고 해요. 이런 속도로 가게 되면 80년 후엔 이 땅엔 리투아니아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 기록이 아주 값진 것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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