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담아온 바다

서천 장포 해변에서 보낸 1박 2일

등록 2005.07.13 15:13수정 2005.07.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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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서천 장포해변
흐린 날의 서천 장포해변양허용
오전 7시.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며칠째 계속 이어지고 있는 장맛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 조금 잦아드는 것 같기는 하지만 뉴스에서는 계속 비 소식이 들려온다. 특히 우리가 떠나려는 충청남도 쪽으로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이런 장마철에 여행을 떠난다는 건 미친 짓임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포기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아침을 먹고 아내와 현준이는 영화를 본다고 인터넷을 통해 영화관을 검색하고, 그러는 동안 예약을 해 두었던 서천의 민박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 못 내려가겠으니 다음으로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쪽에는 비가 안 오니 안심하고 내려오란다. 당황스럽고 황당하다. 이미 여행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비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기에 음식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거의 빈손이나 마찬가지였다. 집 밖으로 나서니 비가 더 많이 내리는 듯하다. 과연 이 비를 뚫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잘 하는 일인지….

집을 나선 후에도 갈등은 계속됐다. 장맛비 때문에 한산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고속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차량들의 행렬로 주차장이 되다시피 변해 있었다. 게다가 줄기차게 내리는 비. 몇 번씩이나 중간에 차를 돌리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을 취소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서천 장포 해변으로 정한 건 그곳에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친구 분의 친정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 친구 분을 만나기로 했다. 그 약속 때문에 아무리 길이 막히더라도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목적지인 서천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30분. 무려 8시간이 걸린 셈이다. 맙소사. 현준이는 왜 이렇게 힘든 여행을 하느냐고 화가 잔뜩 나 있다. 자기 의견은 무시당한 채 아빠의 의지에 따라 지루한 여행을 해야 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루하고 힘든 여행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버린 현준이.
지루하고 힘든 여행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버린 현준이.양허용
민박집에 들어서니 미리 와 계시던 친구 분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건만 그 동안 인터넷을 통해 종종 접촉해 온 탓인지 그리 낯설지가 않다. 천안에서 우릴 위해 2시간 거리를 일부러 오셨다고 하니 막히는 길 때문에 화가 났던 마음이 눈 녹듯이 풀린다.


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바다로 향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둘째 수영이는 바다에 간다고 하니 좋아서 소리를 지른다. 민박집 뒤편의 조그만 구릉과 송림을 지나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다. 솔밭 사이를 천천히 지나니 눈 앞에 넓게 열린 바다가 나타난다. 어느새 비는 멈추어 있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모두 회색이다. 그 느낌이 좋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모두 회색이다. 그 느낌이 좋다.양허용
서해바다여서일까, 아니면 장마 끝이라 그럴까. 첫 인상이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다. 뻘이 섞여 지저분해 보이는 파도, 그리고 어디선가 떠내려 온 오물들이 뒤덮고 있는 해변. 처음 친구 분께서 사진을 통해 장포 해변을 보여 주었을 때부터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곳이었건만 기대만큼 못한 것 같아 다소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그곳에 머물자 점점 그 바다에 정이 가기 시작했다.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넓게 펼쳐진 바다. 그 바다가 뱉어내는 시원한 바람. 끝없는 수평선 위로 먹구름을 품고 앉은 하늘.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과 갯바위들. 그리고 머리 위를 낮게 날아다니며 울음을 토해내는 갈매기들. 비록 흑백 사진 속의 그림처럼 회색과 검은색뿐인 바다였지만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그 묵직함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바다가 마음에 들었다.

거침 없이 바다 속으로 뛰어든 첫째 현준이.
거침 없이 바다 속으로 뛰어든 첫째 현준이.양허용
1시간쯤 지나자 벌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미처 음식 준비를 못한 우리에게 친구 분께서 저녁을 차려 주신다. 밥과 함께 내놓은 조개탕 국물이 사골 국물 이상으로 뽀얗다. 한 숟가락 떠서 먹어보니 진한 국물 맛이 느껴진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밥을 먹고 나니 벌써 캄캄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다. 사방이 어두운데 민박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조개를 캐러 간다고 시끄럽다. 현준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빠는 왜 그런 재미있는 걸 미리 안 가르쳐 줬느냐고 투덜거리더니 우리도 바다에 나가보자고 조른다.

호미와 조개 잡이 쇠스랑을 챙겨 들고 바다로 나섰다. 구름이 끼어 달도 없고 주위에 인가가 없으니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에 깔려 있다. 조심해서 보아야만 겨우 어디에 바위가 있는지 구분할 정도다.

수영이는 두려움을 느끼는지 갯벌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현준이만 데리고 어두운 갯벌로 들어서는데 발 밑으로 물컹거리며 밟혔다가 발가락 사이로 쑤욱 빠져 나가는 뻘의 느낌이 오묘하다. 게다가 물이 빠지기 시작하는 참이어서 무릎까지 푹푹 뻘 속으로 빠져드니 어른인 나도 약간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 현준이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호기심 때문인지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바다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둘째 수영이.
바다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둘째 수영이.양허용
근처에 사람들의 불빛이 보인다. 우리는 불도 없으니 그냥 손으로 더듬어 조개를 찾는 수밖에. 아무 곳에나 멈추어 호미로 뻘을 긁고 손으로 더듬어 조개를 찾았다. 그 동안 여러 차례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 보았지만 이렇게 절대 어둠 속에서 감각에만 의존한 채 조개를 잡아보기는 처음이다. 미끈거리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뻘의 느낌과 무엇이 있을지 몰라 조심스럽게 갯벌을 더듬는 스릴이 짜릿한 재미를 더해준다.

몇 번 그렇게 '장님 문고리 잡기 식'으로 갯벌을 더듬는데 운 좋게 조개 두 마리가 손에 걸린다. 아하, 그렇게 해도 조개가 잡히긴 잡히는구나. 억세게 운도 없는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첫 수확에 고무되어 열심히 갯벌을 긁어보는데 더 이상 조개가 잡히지 않는다. 이제 현준이는 조개 잡이에 흥미를 잃었고 게다가 모기까지 극성이다. 더 이상은 무리라 생각해 바다를 빠져 나왔다.

어두운 밤길을 맨발로 걸어 숙소로 돌아오니 친구 분께서 술 한 잔을 권하신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커다란 그릴에 숯불을 피우고 조개를 한 움큼 올려놓는다. 대나무로 만든 시원한 평상 위에 친구 분과 그 남편 분, 아내와 나, 그리고 아이들이 둘러앉았다. 아이들은 잠시 앉아 조개구이를 받아먹더니 오랜 여행에 지쳤는지 먼저 자겠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어른들만 남아 조개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주고받으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는데 친구 분이나 그 남편 분이나 모두 사람이 참 좋아 보인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에게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인터넷이란 게 참 신기하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끼리 한 공간에서 만나 대화 나눌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주니 말이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독한 소주에 취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6시 반. 겨우 6시간 정도 지났건만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간밤에 제법 많은 술을 마신 모양이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 현준이와 수영이도 일찍 잠에서 깨어난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섰다.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바다가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민박집에서 바라본 아침 풍경.
민박집에서 바라본 아침 풍경.양허용
바다로 가는 길에 노란 달맞이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다. 아침에 보는 바다는 어제 저녁에 보았던 바다와는 또 다른 멋이 있다. 저녁 바다보다 더 깊게, 더 무겁게 가라앉은 듯 보인다. 하늘에서도 묵직한 구름이 위엄 있게 깔려 있다. 그 바다를 사진에 담는다.

현준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하다. 수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가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묻는다. 천진난만한 질문이 재미있다. 아이들은 바다가 그리도 좋은 모양이다. 뛰고 소리치며 때로는 물 속으로 달려갔다 달려 나오며 재미있어 한다. 아이들에게 바다처럼 좋은 놀이터는 없을 듯하다.

바다로 간 아이들, 그리고 그 흔적.
바다로 간 아이들, 그리고 그 흔적.양허용
아침을 마치고 다시 바다에 나갔다. 민박집에서 할 일이라고는 바다에 나가 노는 것이 전부지만 바다는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경제학에서 나오는 한계효용의 법칙도 바다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바다에 나가보니 그 사이에 저 멀리까지 물이 빠져 있다. 신발을 벗어 바위 위에 가지런히 두고 네 식구가 갯벌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이 아니건만 아직도 수영이는 갯벌이 두려운 모양이다. 자꾸만 안아 달라고 조른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두려움은 한층 줄어든 듯하다. 설마 놓칠세라 내 손을 꼭 잡고 잘도 따라다닌다.

친구 분은 갯벌에 나와서도 우리 가족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잡은 조개도 나누어 주고 조개를 많이 못 잡아서 어떡하냐며 걱정도 해주신다. 하지만 그냥 장포 앞 바다에서 조개 잡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 동안 친구 분께서 같이 있어 주셔서 더욱 즐거웠다는 사실을 그 분이 아실지 모르겠다.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난 바다. 그 바다에서 서서 현준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난 바다. 그 바다에서 서서 현준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양허용
그렇게 온 가족이 나서 갯벌을 누비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오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 사정을 생각해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했다. 겨우 18시간쯤 그곳에서 보낸 모양이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친구 분, 그리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던 그 분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어렵게 찾아간 곳에서 쑥스러움과 어색함 때문에 제대로 대화도 나눠보지 못했는데 헤어져야 한다니….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잠시 시간을 내어 들른 서천의 해양 박물관은 그 겉보기와는 달리 전시품이 제법 알차다. 고래·상어·청새치·가오리·물개·펭귄 등 다양한 바다 생물의 표본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다 실내가 그리 어둡지 않아 관람하기에도 좋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조개류는 그 숫자가 많아서 봐도 봐도 끝이 없을 정도다.

알찬 전시품으로 가득찬 서천 해양 박물관
알찬 전시품으로 가득찬 서천 해양 박물관양허용
박물관 한쪽 모서리에 소라 껍데기로 바다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큰 소라를 들어 귀에 대보니 바람 소리가 난다. 수영이의 귀에 대 주니 '휘이이이'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렇게 소라 껍데기 속에 담긴 바다처럼 내 마음 속에 서천의 바다와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 분의 따뜻한 마음을 가득 담고 돌아왔다. 언제든 서천의 바다가 그리울 때면 내 마음을 열고 그 소리를 들어볼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4년 7월 17일~18일에 다녀온 기록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기는 2004년 7월 17일~18일에 다녀온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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