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23회

등록 2005.07.18 07:54수정 2005.07.1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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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7 장 춘야루(春夜褸)

유곡의 거처는 태풍이 휘몰아쳐 간 듯 난장판이었다. 탁자와 의자가 부서져 나뒹굴고 한쪽 벽면 일부가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치열한 격전을 벌인 듯한 모습이 확연했다. 방 안에 제대로 놓여진 것은 없었고, 기이한 것은 오색수실이 마치 거미줄처럼 방안 전체에 걸려 있었다.


아마 갈유의 수양딸이자 유곡의 아내인 소연(小姸)이란 여인이 적을 맞아 격공수문(隔空繡文)의 기예로 상대한 것 같았다. 유일하게 한쪽 벽에 그녀가 자수로 놓은 족자가 걸려 있었고, 그것은 갈유가 이곳을 다녀갔을 때와는 달리 궁장형의 여인이 수놓아져 완성된 채로 걸려있었는데 그 속의 여인은 바로 몽화였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격전을 치렀다면 최소한 한두 구의 시신이 보일만도 한데 전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바닥이나 벽에는 선연한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어 최소한 서너 명은 죽었을 것 같은 치열한 격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음에도 시신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습한 자들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몸을 피한 것일까?)

아득한 정신 속에서도 몽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천지회 내에서의 이상흐름을 감지했었고, 어쩌면 그것이 자신과 연관된 일일 것이라는 의미를 비쳤다. 그녀를 공격한 자들은 언무탁과 마찬가지로 천지회 내부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자책했다. 자신이 위기에 빠지면 그녀 역시 위험할 것이라고 말한 그녀의 예상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았다. 그녀는 사흘 동안 어디까지 알아낸 것일까? 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이미 왼쪽 어깨의 통증은 고통이란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였고, 등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긴 장인은 그의 기혈을 뒤집고 있었다.

"천(天)…!"


그러다 문득 족자 뒤쪽 벽에 피로 쓴 글자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핏줄기가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분명 무언가 피로 쓴 글자였고, 극히 적은 부분이었지만 담천의는 그 글씨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하령… 저 족자를 옆으로 치워 주겠소?"

그것은 송하령도 이미 느낀 듯 했다. 그녀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족자를 옆으로 밀며 쳐들자 글씨는 완연하게 그 형태를 드러냈다.

<천(天)>

피로 급히 갈겨썼는지 글자의 획(劃)은 불규칙했다. 획의 앞과 뒤에는 피가 뭉쳐있었지만 중간은 흐릿했다. 더구나 피가 벽을 타고 흘러내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봐도 무슨 글씨를 쓰고자 했는지 금방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천(天)인가? 그렇다면 몽화 그녀는 천의 의미를 풀었겠군.)

그는 그녀가 남긴 글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텨 온 그에게도 한계가 온 것이다. 백렴과 단사는 부축한 그의 몸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지자 그가 정신을 잃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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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蘇州)의 춘야루(春夜褸)는 동기(童伎)로 유명했다. 기녀가 많기로 유명한 소주에서도 춘야루 출신의 기녀가 많았고, 중원 각지 기루에도 춘야루의 동기는 비싼 값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춘야루는 기녀를 가르쳐 배출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방은 울창한 수목들로 담장처럼 둘러쳐 있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춘야루 내에 이렇듯 조용한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주 특이한 건물이어서 루(樓)라 해야 옳을 곳이었다. 벽은 있었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병풍처럼 접을 수 있게 되어있어 한쪽 구석으로 접어놓자 마치 기둥만 세워져 있는 정자(亭子)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요것이…"

술 취한 사내의 끈적한 음성은 이미 도가 지나쳐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의 오른손은 어깨서부터 흘러내린 옷자락 밖으로 아직 여물지 않은 동기의 분홍빛 속살을 그대로 내보인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남은 왼손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 자꾸 비틀리는 다리 사이를 헤집으려 하였다.

술 취한 사내는 이런 일에 이력이 난 듯 매우 능숙했다. 하지만 술이 취했다고는 하나 그의 외모는 그런 짓을 할 만큼 녹녹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선 그의 얼굴은 매우 잘생긴 편이었다. 하지만 친해지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검미는 그의 의지가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약간 휜 듯한 매부리코와 얇은 입술은 매우 냉정한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말을 한 인물은 그와 맞은편에 앉아있는 장년인. 바로 살천문의 문주인 우교였다. 그의 옆에도 기녀가 있었지만 동기는 아닌 듯 했다. 화장을 별로 하지 않아서인지 기녀의 나이는 스무 살이 넘어 보이고, 몸은 오히려 풍만한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이하게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우교의 곁에서 팔을 두르고 착 달라 붙어있었다.

술 취한 사내의 입술이 동기의 한쪽 젖가슴에 머물렀다가 돌려졌다. 그의 눈빛은 게슴츠레해 보였다. 입술에 침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왜 그리 재촉하시오? 나는 형님이 마지막 재미를 볼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소."

"나는 네가 마지막 재미를 볼 때까지 기다려 줄 인내심이 없구나."

우교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자리의 시작은 오랜 만의 술좌석이었지만 서로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이제 자신이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황임의 대답으로 그 사실은 명확해졌다. 이미 황임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형님은 언제나 여유가 없구려."

"나이가 들면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 시간이다. 젊어서 시간을 낭비한 사람일수록 시간은 그 무엇보다 아까운 법이지."

"나는 시간을 낭비한 적이 없소."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네가 십수년 전부터 술과 계집에 빠져 폐인처럼 산다고 말했지만 나는 네가 그 십수년을 허비하지 않았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우교의 표정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엔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듯 했지만 표정만큼은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이 춘야루를 용담호혈의 절지로 만든 네 실력은 인정할만 하더구나. 더구나 춘야루 출신의 기녀들이 그 동안 전 중원의 기루와 주루로 퍼져 나가 네 이목(耳目)이 되고 있으니, 네 정보력의 정밀함이야 누가 따라 가겠느냐?"

처음으로 황임의 얼굴에 미세한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술에 절어 게슴츠레한 눈빛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맑고 예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소?"

황임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장난기를 벗어 버리고 나직하면서도 침중했다.

"사부가 돌아가실 때 보니 한 성을 사고도 남을 정도로 모아둔 재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더구나. 남은 것이라곤 가까스로 본 문을 운영할 정도의 자금뿐이었지."

"그것은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 형제들에게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주셨기 때문이었소. 그것은 형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오?"

"물론이지. 하지만 그것은 눈가림에 불과했다. 그것은 확실히 여러 가지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문주 자리는 나에게 주시고, 그 동안 모아 둔 재산을 모두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로 인해 너에 대한 형제들의 지지는 네 스스로 남들에게 보이려 노력했던 비참한 모습과 함께 동정까지도 유발할 수 있는 것이었지."

"………!"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보다 많은 재물을 어디론가 빼돌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언제 알았소?"

"왜 그랬을까? 왜 사부는 네가 아닌 나에게 문주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을까? 그리고 왜 그 많은 재산을 빼돌려야 했을까?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까? 그리고 십육 년 전 사부가 직접 수행했던 그 청부의 기록은 왜 뜯겨져 나가야만 했을까?"

느닷없이 우교의 섬광같은 시선이 황임의 두 눈을 찌르자 황임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이미 우교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황임은 곧 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우교가 뭔가를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차피 정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 시기가 너무 일찍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사람은 너무 우매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똑똑한 것도 탈이오. 형님은 그저 알아도 모르는 척 했으면, 아니 아예 모르면 더욱 좋았을 것이오. 굳이 파고 들 일도 없이 본 문의 문주로 남은 여생을 보냈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등 뒤에 너의 칼이 꽂힐 때를 기다렸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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