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합격시키려는 '국가고시'도 있습니다

검정고시와 야학 이야기

등록 2005.07.18 11:13수정 2005.07.1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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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도 고시가 참 많습니다. 흔히 '3대 고시'로 일컬어지는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외에도 요즘은 언론고시, 임용고시, 하다못해 '공무원고시', '취업고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 가히 '고시 공화국'이라 할 만합니다.


이런 시험들은 학력제한이 있는 경우가 많고, 혹 없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기실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더불어 이 사회의 기득권층을 양산하는 도구이기도 하죠. 여전히 이 사회는 고시 출신들이 이끌어나가고 있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부류에 끼기 위해 오늘도 도서관에서, 노량진에서, 신림동에서 두꺼운 책들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고시라는 것은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돈이 있어야 합니다. 워낙 능력이 뛰어나 학원 수강을 할 필요가 없더라도, 최소한 책은 사야 하니까 말이죠. 그 책값이란 게 또 만만찮습니다. 법전 한 권 사는 데 보통 몇 만 원이 듭니다. 돈만 필요하겠습니까. 시간은 또 좀 많이 드나요. 몇 년을 죽자 사자 공부에만 매달려야 겨우 성공할까 말까 한 게 또 고시입니다. 하긴 세상에 날로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렇더라도 이 고시라는 놈은 소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하늘 위에 떠가는 구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이 '보통 사람들'이 응시할 수 있는 고시가 있습니다. 게다가 정부에서 주관하는 국가고시입니다. 연령제한도 없습니다. 단, 학력제한이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을 마친 '고학력자'들은 절대로 응시할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뭘 이야기하려는지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검정고시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대부분이 정규 제도권 교육을 받으셨을 것이고, 따라서 검정고시에 대해 딱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제 주위에는 "아직도 검정고시 보는 사람들이 있나?"라고 묻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육인적자원부에서 2003년 11월 발표한 '고입/고졸 검정고시 제도개선'안을 보면, 1994년부터 2003년까지 검정고시 응시자 수는 계속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003년 한 해만 해도 고입검시(고검), 고졸검시(대검)를 합쳐 응시자수가 7만 명을 넘었습니다. 여기에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중검)까지 있으니, 고학력국가를 자처하는 한국에서도 교육 기회 확대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야학과 검정고시

저 역시 정상적인 경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런 제가 검정고시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게 된 건, 군 전역 후 복학을 한 재작년 가을 서울시내 한 야학에 발을 들이면서부터였습니다. 다음달 초에 예정되어 있는 2005년 제 2차 검정고시까지 합치면 야학교사로서 세 번째 맞는 시험입니다.


그 동안 합격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야학을 졸업한 학생분들도 계시고, 연이은 고배를 든 후 아직까지 도전에 열을 올리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어쨌든 검시 시즌이 되면 교사, 학생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제가 맡고 있는 과목은 고등영어입니다. 영어, 수학이 어려운 건 정규학교 학생들이나 야학 학생들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다만 야학의 학생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고, 개인적인 공부를 할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지요. 가르치는 쪽이나, 배우는 쪽이나 이래저래 고충이 많습니다.

예습복습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학습의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여건이 그러한데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분들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으신지라 잘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십니다.

"아 선생님, 아무리 외워도 도통 안 외워지는데 어떡하면 좋아유?" "선생님 설명을 들으면 그 때는 이해가 되는데 돌아서면 까먹어버리네요" "시험 때 우야믄 잘 찍을 수 있어요?" 등등.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했던 이야기와 다를 게 별로 없습니다.

교사로서 안쓰러워하며 제가 죄송하다고 몇 마디 드리면, 오히려 "저희 같은 사람들 가르치느라 선생님들 스트레스 받으시죠?" "아녀. 이젠 선생님도 다 아시니껜 그런가보다 하시지"라며 웃으십니다.

엊그제는 다음 달 시험에 대비해 보충수업을 두어 시간 했습니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나오셔서 수업을 들으셨습니다. "영어가 어렵기는 한데 너무 재미있어요. 학교 나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라며 손수 참외를 깎아주시는 한 학생분의 말씀에 제가 오히려 뭉클해집니다. 덕분에, 그 날 수업은 참 오붓하고 즐거웠습니다.

사실 검정고시의 효용에 대해서는 야학교사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과연 검정고시가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뭔가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지선다형 문제, 전체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 이런 시험에 대비해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야학에, 그리고 학생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합격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해봐야 결국 종이쪼가리 하나와 자기만족뿐. 결국 제도권 교육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죠.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그나마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고작 2년째 야학에 몸담고 있는 풋내기 교사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검정고시가 최선은 될 수 없을지라도 여전히 이를 원하는 학생들이 존재하는 한, 그것을 매개로 하여 우리가 원하는 다른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10년이 넘게 야학에 몸담고 계시는 제 선배들이 들으면 '수정주의'라며 욕먹기 딱 좋은 이야기지만, 변변찮은 시험 제도일지언정 그것이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이용가치가 꽤 되는 것은 아닐까. 별로 투쟁적이지 못한 저 자신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어쩔 수 없는 한계, 그러나...

불행하게도 검정고시 합격자에 대한 사회의 시각은 과히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모 방송사의 드라마에는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졸로 대기업에 입사한 여주인공이 상사나 동료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제도권 교육을 통해 학업을 이수한 사람들이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이니, 그런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사실 현행 검정고시 제도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보완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소수들의 불만을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적 여건 때문에 검정고시 제도 자체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는 힘든 실정입니다. 검정고시는 걸러내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이 합격시키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검정고시가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단순히 졸업장을 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노력해서 대학까지 진학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도의 빈약함을 훌륭히 극복해내는 이들. 그들은 단순히 '정규학교를 다녔나'를 놓고 구획 짓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대학 서열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현실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분투하는 그들에게는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요. 부끄럽습니다.

이제 시험이 3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야학교사로서 가장 큰 기쁨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 시험에 합격해서 야학을 졸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저희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더운 날씨에도 합격을 목표로 노력하고 계시는 우리 학생분들이 부디 좋은 결과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검정고시를 발판삼아 더 멀리, 더 높이 훨훨 날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학생분들, 힘내세요.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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