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선생의 묘소.박성규
지난 73년 12월24일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여민루는 조선시대 아산현 관아 입구에 세워졌던 문 위에 누각을 만든 문루(門樓)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각형의 주춧돌로 배열하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만들었다. 아래층 3칸에는 각각 문을 달아 통로로 사용했다. 왼쪽과 오른 쪽 협간을 문 위에 가로 댄 나무 위에는 홍살을 설치했고 측면의 2칸은 관벽으로 막았다. 1415년(조선 태종 15년) 대제학을 역임한 것으로 정이오(鄭以吾)의 누기(樓記) 가운데 아산 현갑 최안정(崔安正)이 부임한 지 3년만에 건립했다.
여민루라는 이름은 당시 영의정이던 호정공 하륜이 ‘취위민지의(백성을 취하는 뜻을 취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며, 여민루 현판에 ‘갑오류하지현서(甲午榴夏知縣書)’라 기록돼 있다. 1834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여민루를 지난 3백여m를 올라가면 이조 고종 때의 정치가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선생의 유허(기념물 제13-1호)가 묘소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다소 초라하고 단촐한 느낌을 주지만 자녀들의 조선 역사에 대한 학습지로 부족함은 없을 듯하다.
김옥균은 1872년 고종 9년 문과에 급제해 옥당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일본에 건너가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수신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 일행의고문으로 일본에 들어가 활약한 인물. 김옥균은 한말 개화운동가였으며 독립당을 조직하고 국정을 개혁해 낡은 폐습을 타파하려다 실패, 1894년 3월28일 홍종우에게 살해됐다.
이듬해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며 법무대신 서광범,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죄명을 씻고 관직이 회복됐으며, 순종 때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을 받고 관리를 보내서 제사지내는 대우까지 받았다. 이 곳 묘소는 일본 청산의 외인묘지에 있던 것을 1924년 9월11일 옮겨온 것이다.
울창한 숲, 맑은 물, 아름다운 경관… 영인산휴양림
김옥균 묘소를 나서 인근 1km 이내에 위치한 곳에는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자연휴양림이 있다.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영인산휴양림이 그 곳이다. 공익적인 기능을 살려 국민의 정서함양, 보건 휴양에 기여할 목적으로 조성된 국민휴식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