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을 넘어 평화와 공존으로

‘딸들의 반란’, 보다 아름다운 사회 건설의 계기 되기를

등록 2005.07.22 14:23수정 2005.07.2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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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소위 ‘딸들의 반란’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 공판에서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여성의 종중(宗中) 회원 자격을 배제한 관습과 대법원 판례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여성도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종중 회원의 자격을 갖고 종중의 대소사에 남성과 똑같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판결은 올 3월에 통과된 호주제 폐지 법안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양성 평등의 이념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 판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림 등 사회 일반의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회 전반적으로는 대체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필자 역시 이번 판결이 남녀차별은 물론 모든 사회적 차별이 없는 보다 민주적인 사회 건설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라면서 적극 환영하는 바입니다.

본래 이 세상 만물과 모든 현상은 음양의 역동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는 음과 양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 음과 양 어느 한쪽만이 작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의 조화로운 관계는 음과 양의 역동적인 평형 상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과 양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의지하고 돕는 상반상생의 관계로서, 한 쪽이 강해지면 한 쪽은 약해지지만, 그러다가 그것이 극에 달하면 다시 반대쪽이 강해지면서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게 되는 역동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이 극단적으로 강한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오래 갈 수는 없는, 곧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갈 수밖에 없는 과도기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과 양은 상반적이면서도 상보적인 우주의 두 가지 기운을 가리킵니다. 이 중 양은 분리, 경쟁, 승리, 공격, 지배, 분석, 능동, 적극, 성장, 확장, 용기 등의 성질을 지닌 남성적인 기운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서 음은 수렴, 협동, 양보, 반응, 화해, 종합, 수동, 소극, 안정, 공존, 인내 등의 성질을 지닌 여성적인 기운을 의미합니다. 이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룰 때 이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인류 사회는 양의 기운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남성 위주의 방향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결과로 현대 사회는 온통 양의 기운만이 판치는 남성 우위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의 뜻을 존중하며 상호반응하고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쟁취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지배하려는 태도가 지배적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겸손하고 질박하며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과시적이고 화려하며 끊임없는 양적 성장을 위해 내달리는 어지러운 삶의 방식이 지배적입니다. 이처럼 양적 기운의 과도한 팽창 때문에 현대 사회는 앞에서도 생태계의 파괴, 빈곤과 기아, 폭력 범죄와 전쟁, 인간성의 황폐화, 생의 공허함과 무의미성 등이 지배하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에 달하면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이치이니, 양의 기운이 극에 달한 인류의 문명도 이제 다시 음의 기운 쪽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 선인들은 이를 일러 ‘후천개벽’의 시대라 불렀습니다.

일찍이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은 천지개벽 이후 인류의 문명세계가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치달아 와 그 극에 이르렀으며, 이제 새로운 문명의 후천개벽 시대를 열어가야 하며 또한 그러한 시대가 열릴 것임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후천개벽 시대란 상극적인 대립이 격화된 선천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이 시작되는 상생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말합니다.


즉, 이것은 우주 생명의 조화로운 질서를 본받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갈등과 대립의 분열관계를 넘어서 서로가 둘이 아닌 존재들(한울님)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대동세계(한울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최제우 선생은 우리가 앞장서서 그러한 아름다운 후천개벽의 세상을 건설해 나갈 것을 제창했습니다.

그 후 증산도의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 선생도 그 맥을 잇는 후천개벽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강증산 선생이 얘기한 후천개벽의 세상은 해원(解寃)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즉 그것은 소외되고 억압받던 모든 이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해방되어 모두가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상생의 대동세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후천개벽의 새로운 문명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지배적이던 양의 기운과 가치가 줄어들고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강증산 선생은 남성적인 양의 기운과 가치를 누르고 여성적인 음의 기운과 가치를 북돋음으로써 아름답고 평화로운 새로운 문명세계를 건설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적인 가치, 음의 기운이 주가 되는 후천세계라는 생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시대의 뜻있는 사상가들의 음성을 통해서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불교에도 이러한 후천개벽 사상과 통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 사후 한참 뒤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지상의 인간세계로 하생하여, 용화수 밑에서 중생을 성불하도록 제도한다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미륵 부처님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새로운 용화세계는 경쟁과 승리,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협동과 양보, 화해와 공존이라는 자비로운 여성적 가치가 통용되는 조화로운 화엄세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자씨(慈氏) 보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미륵 부처님은 음의 가치, 여성적 가치를 선양하는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절집의 용화전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상을 보면 흔히 남성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소위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 있는 아름다운 미륵불상은 여성적인 모습입니다. 이 미륵불상은 마을과 절을 수호하는 의미로 초입에 세워놓았는지라 미륵장승이라 부르는데, 이 미륵불상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a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의 미륵불상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의 미륵불상 ⓒ 이찬훈

미륵부처님이 출현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할 용화세상은 경쟁과 승리, 정복과 지배라는 소위 남성적 가치보다는 자비와 보살핌이라는 여성적인 가치가 두루 퍼지는 세상일 터이니 그런 세상의 부처인 미륵불의 모습도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여성의 모습 쪽이 더 어울릴 법 합니다. 아마도 이런 여성적 모습의 미륵 불상을 빚은 우리네 선조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처럼 여러 선인들이 얘기했듯이 앞으로 우리들이 건설해가야 하는 세상은 경쟁과 승리, 차별과 지배라는 남성적 논리와 가치가 아니라, 평등과 평화, 공존과 상생이라는 여성적 논리와 가치가 넘치는 세상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해 온 그릇된 남녀차별과 남성우월주의적 제도와 문화를 철폐하고 바꿔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달성된 남녀평등을 바탕으로 협력과 공생, 화해와 사랑 같은 음적인(여성적인) 가치가 확산되는 보다 인간다운 사회가 이룩되어야 합니다.

필자는 이번 판결이 그동안 빼앗겼던 여성의 권리를 되찾는 차원을 넘어서 경쟁과 승리, 정복과 지배의 살벌한 현대사회를 극복하고 보다 인간답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는 적극적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유림 등 일부에서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종친회 운영을 어렵게 한다거나, 가족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태껏 여성 차별의 잘못된 관행 위에 세워진 제도와 관습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곤란인 이상, 이번 일을 계기로 그런 것은 시대에 맞게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서 여성계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여성의 권리와 이익의 쟁취라는 투쟁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 사회 문화 전체를 평화와 사랑이라는 여성적 가치로 충만한 보다 인간다운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는 더 넓은 사회적 실천의 지평으로 계속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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