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그림 아이완
여중생 사망 소식은 사건 당일 들었다. 같이 일하던 단체 활동가의 전화를 받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지자체 선거 날이었고, 전동록 씨 장례를 마치고 몸도 마음도 몹시 지친 내게는 간만에 맞는 휴일이었다. 당연히 그 소식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기사를 검색해 보았지만 거의 보도된 게 없었다. 기껏해야 몇 줄이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기사의 양으로 판단하는 못된 버릇이 내게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망 사고이고, 일단 사건이 발생하면 되도록 빨리 현장에 가 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몸을 추켜세웠다. 정말이지, 유가족을 만나러 의정부로 갈 때만 해도 사건이 그렇게 커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빈소에 도착하고 나서 이 사건이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빈소 한편을 가득 메운 미군측이 보내온 조화와 직접 빈소를 방문해 문상을 하던 미2사단 미군 지휘관들. 그동안 미군이 가해자인 여러 사건 사고를 접했지만,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미군측에서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확대되기를 두려워한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한국의 대다수 언론, 시민이 외면하고 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내가 의정부로 가기 직전 같이 동행할 기자를 찾았을 때 언론사는 ‘월드컵 취재로 빼낼 기자가 없다’며 거절한 터였다.
그렇게 온 나라가 월드컵의 붉은 물결에만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을 때 두 여중생의 장례식은 모교에서 친구, 선후배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히 치러졌다. 그날 두 여중생의 친한 친구들 몇 명은 화장터까지 따라와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그때 시민기자 자격으로 취재하고 있던 내게 그 여중생 친구들이 다가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두 친구가 죽게 되었는지 많이 궁금해 했다. 순식간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내 주변을 빙 둘러쌌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얼마 안 가서 순진한 학생들을 선동할 것을 ‘염려한’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을 받고 자리를 떴다.
당시 무엇 하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내게 집중하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왜 이런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지 억울하다며 제발 이번 사건이 크게 보도될 수 있으면 좋겠다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야말로 사건 초기 대다수 언론이 침묵하고 외면하는 가운데 이 사건을 어떻게든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은 돌아왔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피해자를 사무적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피해자의 인권 내지는 피해자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피해자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곧잘 소외되거나 도구화되기도 한다. 특히 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한미 관계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피해자의 고통이 내게로 전이(轉移)되는 과정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의도하지 않게 피해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늘 갈등하고 고민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