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다시 한번 친해져 볼까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을 읽고

등록 2005.07.27 13:32수정 2005.07.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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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것은 93년경 <일각수의 꿈>을 통해서다. 원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다소 긴 제목인데, 감히 무라카미 일생의 역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루키 고유만의 특색 있는 글로 가득찬 소설이다. 특유의 쿨한 느낌의 글과 기발한 상상력은 나를 단숨에 하루키 팬으로 변화 시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필두로 해서 <댄스댄스댄스>까지 이어지는 일명 양 시리즈 또한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국내에는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루키 자신이 이 책은 독자들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밝혔던 것처럼, 하루키가 어느새 자신만의 글쓰기에서 벗어나 수많은 독자들을 고려해야 될 만큼 인기도가 상승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책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더불어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반감 시키는 책이기도 했다.


a <어둠의 저편>

<어둠의 저편> ⓒ 문학사상

이후 하루키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이후 발간되는 수필집, 단편 소설 등은 이제 더 이상 구입 일순위의 책이 아니었다. 아마도 양 시리즈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작가 데뷔 25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되었다는 < After Dark >도 내게 약간 망설임을 주었지만, 잠시 흟어본 줄거리는 내게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하였다.

'After Dark'라는 원제가 한국어판에서는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어둠의 저기 멀리 있는 '저편'은 아니고 '어둠이 내린 후' 혹은 '어둠 속' 정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품어 본다. 일본에서도 딱히 일어 번역 없이 카타카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 'After dark'로 의도한 의미가 어떤 단어와 부합될지는 모르겠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어둠이 절정에 이른 12시경부터 새벽이 올때까지 어둠 속에서의 여러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집에서 계속 잠들어 있는 언니를 피해 어둠 속으로 나온 마리, 이런 마리가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일은 현실을 크게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밤이 아니었다면 일어나거나 들을 수 없었거나 느낄 수 없었던 것이며 마리는 이러한 현실을 하룻밤 새에 겪게 된다. 쿨하게 외부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하지 않고도 혼자서 꿋꿋할 수 있는 마리는 중국인 창녀, 모텔의 직원들, 다카하시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 맞추어 살아갈 수 밖에 없어서 지쳐 이제는 끝없는 수면 속으로 빠져 버린 언니 에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나간다.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듯이 에리는 작품 내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만 여러 공간을 넘나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루키 특유의 기발한 상상은 더 이상 없다. '쥐의 소설에는 섹스 얘기와 사람이 죽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놔두어도 사람은 섹스를 하고 죽기 때문에, 당연한 일을 적을 필요는 없다던 쥐의 소설에 넘치던 상상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는 현실과의 개연성이 아주 농후한 상상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양 시리즈에서 꽤 쿨하지만 누구보다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주인공은 마리에게 애정을 가지고 마리와 에리의 화해를 도와주기 위해 이 소설에서 드디어 다카하시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보다 애정이 깊어진 시선으로 마리에게 접근한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특히 불이 발견되기 전에 미명의 인류들은 해가 떨어지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신체 조건, 후각 등을 가진 맹수들을 피해 나무 위나 동굴 속에서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어둠에 적응한 눈을 치켜뜬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밤은 편안한 휴식 시간이 아니라 견뎌내어야만 하는 두려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기억들이 인류의 유전자 속에 남아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의 발견으로 안전한 밤의 수면이 보장되고 또한 문명이 발전하면서 밤은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갔지만 밤을 새서 컴퓨터 업무를 봐야 하는 등장 인물이나 창녀들, 모텔 직원들처럼 어둠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탈감에 불특정 대상에게 모진 폭행을 가한 시라가와는 새벽이 오는 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며 복수를 꿈꾸는 조직은 엉뚱한 곳에 대고 주절거리기만 한다.

어렸을 적 마리와 에리가 정지해 버린 어두운 엘리베이터 내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있었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의지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들 스스로의 어둠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카하시나 마리는 능동적으로 어둠 속에 뛰어들어 어둠을 대면하고 이겨내는 입장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에 던져셔 어둠을 견뎌내어야만 한다. 끝없는 수면에 빠져 있는 에리의 경우 시간적인 어둠의 의미는 중요치 않다. 그녀의 경우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삶 자체가 어둠이었으며 그 어둠을 밝혀줄 수 있는 가족과 마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 어둠을 피하기 위해 수면 속에 빠져든다. 이제 마리가 와서 그 어둠을 걷어내어주면 에리 또한 어둠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본 하루키의 책이다. 예전 좋아하던 작품들에서 느껴지던 가깝지만 나와 타인과의 경계는 확실하게 구분되던 쿨한 주인공들은 이제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하루키 자신이 그만큼 연륜이 쌓여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된 것일까? 전형적인 하루키 스타일의 등장인물로 보이는 마리는 다카하시와 중국인 창녀, 모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만의 쿨한 세계에서 벗어나 교류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하루키와의 교류의 문을 나도 열어본다. 갖가지 은유나 비유, 혹은 고급스러운 표현들을 가져다 칭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루키는 하루키면 된다. 하지만 예전의 하루키는 아닌 것 같다. 10여년 전 처음 만났던 하루키는 이제 내개 조금 색다르고 원숙한 모습으로 새로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나도 닫아두었던 문을 다시 열고 귀기울이려 한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서점 Yes24와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에도 등록한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 서점 Yes24와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에도 등록한 글입니다.

어둠의 저편 - 중독자와의 삶의 길을 찾아서

조혜자 지음,
문예운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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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대한 관조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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