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책 표지당대
얼마 전 친구 셋이 모였다. 우리 셋은 좀 묘한 관계다. 어릴 적엔 똑똑하고 얼굴도 예뻤으며 언니처럼 이해심도 많았던 친구를 사이에 두고 시기와 암투가 오고 갔던. 세월은 흘러가고 각자의 길을 가다보니 우린 너무 멀리 가 있었다.
가장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은 나이고, 뭐든 옳다고 믿은 일에 열심히 쫓아다닌 건 그녀였다. 그러나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피나는 삶을 감수하며 바르게 살려 노력해도 하루하루가 힘겨운 건 우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또 다른 그녀였다.
이젠 골치 아픈 삼각관계도 추억 속 앨범으로 접어 놓은 지 오래다. 꽤 오랫동안 우리는 또 다른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너무나 낯설었다. 난봉꾼 남편을 견디다 못해, 견디려 해도 빗을 감당할 수 없어 두 아이만 데리고 무작정 고향으로 올라 왔다는 또 다른 그녀. 정말 사는 게 거짓말 같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 귀향이후, 얼굴 한 번 보자고 셋이 모인 첫번째 자리였다. 지나온 사정은 이미 전화로 듣고 한차례 눈물바람을 한 후라, 자연스럽게 평소대로 환경문제, 건강한 먹을거리, 참교육 따위에 대해 친구의 일장연설이 시작 됐다. 찌들고 팍팍한 서울 살림살이에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세례라도 받듯 열심히 듣고 있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 날도 친구의 강의는 계절마다 열리는 특강처럼 익숙하고 고마웠다.
친구의 달변을 반쯤 벌릴 입을 하고 듣고 있는데 문득 평소와는 다른 썰렁함이 느껴졌다. 또 다른 그녀가 오늘 강의에 영 성의를 보이지 않고 딴전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아차! 싶었다. 또 다른 그녀에겐 우리 하는 꼴이 시시껄렁한 짓거리였고 배부른 자의 배 두드림이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 둘 데리고 월세 내가며 혼자 살아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 목구멍에 쌀알 넘어가는 것만도 고맙고, 무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라는 '속내'가 얼굴에 나타날까 애써 시선이 흐트리고 있었다.
우리도 나름대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이고자, 아이들 건강과 참교육을 걱정하는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벌거벗은 또 다른 그녀 앞에선 남루하지만 뭔가 걸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작가 공선옥은 곳곳에 숨어 있던 나의 치부를 들추어낸다. 그녀는 먹고 살기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스스로를 낮추어 작가라는 지상의 고고함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삶과 같은 선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 처절함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더욱 쓰린 것도 작가와 닮아 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솔한 감동이 있다.
TV에서 귀농자들이 자연과 함께 하는 평화로운 삶을 보여 주고 시작하는 내레이터가 있다. TV 속 귀농 주인공들에게 여지없이 따라 다니는 수식어들, 인물설정에서 필요한 요소.
'내로라하는 대학출신이었던 그녀(그), 제법 잘나가는 직장을 다녔던 그(그녀)'
그러니까 학벌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막노동판에서 일하다 갈 곳 없어 귀농을 했다는 이력은 연출 불가능한, 흥미를 유발시킬 수 없는 막장인생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TV 속 목가적 분위기에 충분히 감동한다. 그러곤, 생겨나는 감정.
'그래 나도 우리 아들 당신처럼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대학에 번듯한 직장 다니고 나면 당신처럼 살아도 상관 않겠어. 니어링 부부처럼 책이라도 내고 농사짓는 철 피해 세계를 다니며 강의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나도 귀농을 고려해 볼 테야.'
이런 냉소적인 반응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속에 비아냥거림이 있다는 걸 감출 순 있어도 지울 순 없다.
나의 치부는 공선옥으로 인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나도 모르게 그녀만큼 솔직해 지고 싶다. 그리하여 어디쯤부터 꼬여 있는지. 그것을 숨겨두면 나와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건지. 매일 얼굴 마주 하는 나의 이웃들과 고민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리더스가이드> <알라딘>에도 실었습니다.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
저자 : 공선옥
출판사 : 당대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당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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