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앗아간, 보성의 초록빛

전남 보성녹차밭에 다녀왔습니다

등록 2005.08.03 03:04수정 2005.08.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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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CF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몇 년 전, 그 언제부터인가 나는 기회가 되면 꼭 '보성녹차밭'엘 한 번 가봐야지 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강렬한 초록이 그리울 때마다 컴퓨터 바탕화면을 보성녹차밭으로 덮었었다.

그런 그 곳을, 갈 수 없는 무릉도원보다 현실적 이상향이었던 그 곳을 지난 주말 다녀오게 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올 봄 내내 보성녹차밭 타령을 하다가 매번 이런저런 핑계들이 생겨 가지 못하다가 드디어 가게 된 것이었다.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7시 30분 출발인 첫차를 타고 순천까지 가니 10시 30분. 순천 고속터미널에서 순천 시외버스터미널로 택시 타고 가서, 보성행 완행열차 표를 끊어 보성에 도착하니 12시 15분. 마지막으로, 보성에서 녹차밭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녹차밭(대한다원) 입구에서 내리니 그럭저럭 오후 1시였다.

첫 대면, 삼나무 가로수

'옳거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읊조리던 삼나무 가로수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먼. 아, 나도 드디어 그 길을 한 번 걸어보는 건가, 엉? 그런거야?'

이름은 많이 들었어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삼나무. 나는 삼나무의 키가 그리 큰 줄일랑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막연히 삼나무 하면 전나무 사촌쯤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삼나무는 키가 얼마나 큰지, 아마존 어느 깊디 깊은 골짜기에서 자라는 열대우림처럼 하늘을 향해 쭈욱 뻗은 것이, 쳐다보노라니 눈이 아찔하였다. 모르긴 해도 10~15미터는 족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모르긴 해도, 나무의 수령 또한 환갑진갑(?) 다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쭉쭉빵빵'한 삼나무 가로수는, 조금 보이다 말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충분히 여유롭게 감상하면서, 심호흡을 하면서, 혹은, 동행과 속삭이면서 걸을 만큼 길었다. 마침 주말이라 사람들이 꽤 붐볐는데 다들 삼나무의 수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직 '본론'은 시작도 안 했는데….

아, 드디어 녹차밭


삼나무 가로수를 얼마쯤 남겨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나와 조금 올라가니 드디어 꿈에 그리던 녹차밭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장자리가 삼나무로 둘러싸인 초록의 평원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였다. 와아! 내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머, 세상에! 녹차밭은 컴퓨터 바탕화면을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그리고 장엄하였다.

마침 내가 간 날은 날씨가 덥고 습한 가운데 햇살이 눈부신 그런 날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녹차밭 허리 깨에서 아래를 굽어보자니 차밭은 햇살을 듬뿍 받아 눈이 부셨고, 삼나무 숲은 차밭 가장자리에 음영을 드리우면서 뿌옇게 그리고, 아스라이 서 있었다.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초록의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 형용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참으로 형용할 수 없었다, 문자가 필요 없었다. 다만, 차밭과 삼나무와 내가 하나가 될 뿐이었다.

녹차밭 전경
녹차밭 전경정명희

녹차밭 언덕에 있는 나무 그늘에 쉬면서 바라본 초록 세상
녹차밭 언덕에 있는 나무 그늘에 쉬면서 바라본 초록 세상정명희

이젠 남의 사진 무단으로 빌리지 않고 내 것으로 바탕화면을.
이젠 남의 사진 무단으로 빌리지 않고 내 것으로 바탕화면을.정명희

속세를 떠나 살던 두 여인이 자전거 타던 길이 조금 보이네.
속세를 떠나 살던 두 여인이 자전거 타던 길이 조금 보이네.정명희

차밭을 사이에 두고 삼나무와 마주서다.
차밭을 사이에 두고 삼나무와 마주서다.정명희
뒤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생각 같아서는 여러 날 보성 언저리에 묵으면서 '가고 또 가고, 보고 또 보고' 싶었다. 한낮의 녹차밭도 좋았으나 몇 시간 머물면서 생각하니 그 풍경은 그런 한낮보다는 이른 새벽부터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새벽, 동트긴 전 어스름부터 해가 솟아오르고 그 찬란한 아침 햇살이 밤새 촉촉해진 차 잎을 조금씩 말려 가는 그 찰나에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책을 읽다가 혹은 맘에 드는 영화를 보느라 밤을 새고 뜬 눈으로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하루 해가 밝는 것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도심의 아파트에서도 그러할진대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녹차밭에서 새벽을 맞고 아침을 맞는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리고 여한이 없다.

아니, 육체노동엔 웬 만큼 자신이 있는 나이니 만큼 봄 한철 차 잎을 따는 시기엔 아예 녹차 따는 여인네로 취직을 해 볼까나. 지금이야 불가능하지만 한 십 년 후쯤에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아, 나는 반드시 녹차 따는 여인네가 될거야, 되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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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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